오피니언 On Sunday

대선급 정쟁과 국민 피로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 번 죽이는 비열한 짓입니다.”

 정가의 시계가 6개월 전 대선 정국으로 되돌아갔다. 대선 패배 이후 침묵해왔던 민주당 문재인 의원이 격렬한 어조로 여권을 공격했다. 진보단체들도 정부·여당을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22일 저녁 서울 광화문은 이들이 켠 촛불로 뒤덮였다. 이명박정부 중반기 잇따랐던 대학가의 시국선언 릴레이도 재연됐다. 이에 맞서 보수 단체들도 여의도에서 야당의 국정원 국정조사 주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각각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발언과 국정원 댓글 사건을 놓고 국정조사를 하자고 맞서며 날 선 대결을 벌이고 있다.

 대선 정국을 방불케 하는 정쟁의 배후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국가기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으면서도 불구속 기소로 결론 내려 ‘정치적 수사’를 했다는 오명을 얻었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도 대선 직전 터진 국정원 댓글 사건을 축소 수사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대선 사흘 전 그의 지휘로 발표된 경찰 수사 결과는 대선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모든 논란의 씨앗은 국정원의 댓글 사건이다. 이 사건을 놓고 검찰이 원 전 원장의 책임을 물어 기소하면서 수세에 몰린 여당이 남재준 국정원장의 허락하에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록 일부를 열람하고 이를 공개하면서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가안보와 국익증진이란 고유 업무 대신 국내 정치에 개입해 논란을 자초한 국정원에 우선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보(情報) 아닌 정보(政報)를 수집하고 생산하는 데 열을 올린 셈이다. 여기엔 국정원의 구조적 한계 탓도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역대 국정원장들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 대통령의 심복으로 물갈이됐다. 노무현정부에 몸담았던 한 야권 인사는 “대통령이 국정원장에게 ‘요즘 야당은 어때요?’라고 한마디만 해도 국정원 조직 전체가 야당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정치적 중립을 상실한 국정원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록을 놓고 당분간 ‘무한경쟁’을 벌일 여야 정치권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여당은 물론 야당도 NLL 발언록을 공개하자고 주장하지만 속내는 딴판이다. 야당은 발언록 공개의 전제로 국정원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반면 여당은 국정원 국정조사의 전제로 발언록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에 난처한 부분을 회피하기 위해 서로 들어주기 힘든 요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국은 급랭되고 6월 임시국회는 민생 대신 지루한 정쟁의 늪에 빠져들 공산이 크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반년 만에 대선급 정쟁에 다시 휘말린 국민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