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세상의 투영인가 … 진격하는 '진격의 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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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서 주민들이 성벽을 뚫고 들어온 거인들과의 전투로 화염이 솟아오르는 성벽 너머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거인(아래 사진)은 신장 5m의 작은 거인부터 50m 이상의 초대형 거인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원작자 이사야마는 "어린 시절 덩치 큰 아이와 스모 시합을 할 때의 두려움이 작품에 반영됐다"고 했다. [사진 애니플러스]

‘진격의 거인’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만화·방송·SNS 등을 가리지 않고 있다. 발원지는 동명의 일본 만화(작가 이사야마 하지메)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을 상대로 한 인류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동일한 콘텐트가 두 나라에서 동시에 호응을 받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원작 만화는 2009년부터 월간 만화잡지 ‘별책 소년 매거진’(고단샤)에 연재되고 있다. 단행본으로는 10권까지 나왔다. 4월 초 TV 애니메이션(아라키 데쓰로 감독)으로 방영되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애니메이션 방영 후 750만 부가 더 팔려, 이달 초 누적 판매부수가 2000만 부를 넘어섰다. 전자책 판매순위도 1위부터 10위까지 휩쓸 정도다. 내년 개봉 예정으로 실사영화도 만들어진다.

 한국에서의 인기도 이에 못지 않다. 2011년 국내에 정식번역본으로 출간된 『진격의 거인』(학산문화사)은 지금까지 35만 부 넘게 팔렸다. 만화로는 드물게 교보문고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오르기도 했다. 학산문화사 황정아 팀장은 “와인 열풍을 불러왔던 『신의 물방울』을 능가하는 판매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도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선보였다. 국내 판권을 가진 애니플러스는 처음에는 일본(매주 일요일 새벽 2시 방영)과 사흘간의 시차를 두고 방영해왔다. 하지만 팬들의 성화 때문에 2주 전부터 일요일 밤으로 방영시간을 앞당겼다.

 애니플러스 형민우 이사는 “유료 VOD 다운로드수가 다른 콘텐트보다 7배 정도 높다”며 “한일 동시방영 애니메이션을 수년간 해왔는데, 이 정도로 인기가 뜨거운 작품은 처음”이라고 했다.

 『진격의 거인』은 27살 신인작가의 데뷔작이다. 신장 15m 내외의 거인들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머리나 팔 다리가 잘려도 죽지 않고 금세 재생된다. 거인들은 인간이 쌓아놓은 50m 높이의 3중 방어벽을 차례로 파괴해가며, 인류를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인류는 엘리트 군인들을 앞세워 거인에 맞서지만, 끊임없이 나타나는 거인들 앞에서 속수무책일 뿐이다.

 원작은 거대 시스템에 갇힌 소시민의 일상, 그 곳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지 등을 두루 짚고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인류가 거인에게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은 위압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건드린다”고 설명했다. 일본 산케이 신문도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의 무력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오히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전했다.

  작가 이사야마는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거인에 맞서는 인류의 모습은 다른 아이들보다 10㎏이나 야위었던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만화에서 일본의 현실을 읽어내는 시각도 있다. 일본만화 평론가 이즈미 노부유키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무력감이 작품 전반에 표현되고 있다”고 했다. 3중 성채 안에서 안일한 평화를 누려온 극중 인류의 모습이 장기불황·저출산·고령화에 빠진 일본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작품에는 서민들을 전선으로 내모는 지도층,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 자기 재산만 지키려는 상인 등 적나라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공포에 질린 만화 속 인류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터넷 등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현대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미지의 공포 앞에서 분열되는 인류의 절망적 모습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거인을 일본의 중국 콤플렉스로 해석하는 등 인터넷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거인의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한 설정이 가장 큰 흥행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정현목·이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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