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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승리|진도 새마을 농민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진도 산꼴짝에 새마을 농민원의 종이 울렸다. 지난 17일 상오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고즈넉한 언덕바지에서 향토개발의 보리알을 자처하는 조그만 배움터가 문을 열었다. 집념의 화신 김윤규씨(45)가 마음을 다진지 20년. 10년을 두고 일군 땅 위에 3년을 걸려 세웠다는 조그만 흙벽돌집 두 채. 평화로운 두메마을에 은은히 메아리지는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른도 어린이들도 대견스런 눈빛으로 가득 차 있다.
종채를 치다말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씨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웅얼진 20년의 집념이 북받쳐 오른 것이리라.

<원장은 불구 상병>
남 못지 않게 화려한 인생출발을 했던 그였지만 겹친 전란과 불운에 빛을 빼앗긴 반생이었다.
고군면 석현리 3천석의 부호 김형우씨의 9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난 김씨는 목포문태중에 다니다 해방 전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46년5월에 24살의 나이로 문태중 6년에 다시 복교했다. 졸업 후 김씨는 꼭 욋과대학에 가라는 아버지의 고집을 뿌리치고 58년 농민을 가르쳐보겠다는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농대 3년 때 6·25가 터져 아버지를 비롯, 식구가 모두 학살당했다.
살아 남은 그의 3형제는 나란히 입대, 전장을 누볐다.
화천지구 전투에서 불구의 몸이 된 김씨는 53년10월 중위로 제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54년9월1일) 광주도청 앞에서 평소 그를 아끼던 유달영 교수를 만나 다시 복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개간에 가재 탕진>
만학이었다. 서른이 가까와 농대를 졸업한 김씨는 곧 석현리 이장직을 맡아 농민을 일깨우고 싶어하던 그의 꿈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59년 초 여름 녹진리 야산 13정보를 일구기 위해 전재산 4만원을 들이기로 결심, 아내와 함께 황무지개간에 도전하고 나섰다.
부부가 합심하여 한 사람이 하루 1평을 일구게 되면, 하루 2평의 옥토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고된줄 모르고 땅을 파고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야산을 개간하며 어려운 고비에 여러 번 부딪칠 때마다 김씨는 여자의 미덕은 순종뿐이란걸 느꼈다고 뒷날 친구들과 마을사람들 앞에 털어놓았다.
김씨 부부의 흙에 대한 집념과 농촌개발에 대한 도전은 날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됐고 이 소문이 마을과 마을로 번지는 동안 김씨에겐 상록수상을 비롯하여 진도군농협이 주는 상 등 수많은 상장이 날아들었고 많은 부상이 안겨졌다.

<올 순익만 65만원>
김씨 부부는 여러 곳에서 받은 부상을 모두 농로개발과 농민원 개원에 아낌없이 바쳤다.
김씨 부부의 집념은 마침내 빛을 보게되어 헐벗었던 이 마을에 27가구를 이주시켰고 가구마다 2정보 이상의 농토를 가진 부촌으로 만들어 놓았다.
새마읕 농장은 올해에 순수익 65만원을 올렸으며 이번에 문을 연 농민원을 짓기까지에도 이 새마을 농장이 밑거름이 되었다.
김씨는 농민원이 문을 열던 날 『학비를 받지 않으며 모두 기숙사에 무료로 수용하여 알찬 농민의 아들을 길러내겠다』고 포부를 털어놨다.

<1기생 20명 입촌>
새마을 농장의 기적을 지켜 보아왔던 마을 청년들도 서로 농민원에 들어가려고 앞을 다투었기 때문에 김씨는 1기생 20명을 뽑는데 진땀을 뺐다고 흐뭇해했다.
새마을농장에 놀이 지는 무렵 김씨 부부는 농민원의 벽을 대견스레 쓰다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진도지역사회개발에 이바지 할 사람이 나온다면 나는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면서 주위에 버려져있는 넓은 땅을 다시 개간할 의욕에 넘쳐있었다. <진도=최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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