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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소, 갯비린내 나는 사랑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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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섬에서도 사랑은 쉴 틈이 없다. 한창훈은 “사람들이 안 들리는 척, 안 보이는 척 하는 주변부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놓고 들으면 안성맞춤인, 그런 이야기가 쏟아졌다. 한창훈(50)의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문학동네)는 트로트 메들리를 닮았다. 바닷가의 고달픈 인생을 그려온 그가 사랑 이야기로 돌아왔다.

 전남 여수 거문도 섬사나이의 손을 거친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연애담은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펄떡 뛴다. 단편 9편에 담긴 로맨스는 모두 보기 좋고 매끈한 사랑과 거리가 멀다. 지지고 볶고, 그래서 측은하고 안쓰럽다. 거문도에 머물고 있는 그를 전화로 만났다.

 왜 갑자기 사랑타령이냐고 대놓고 물었다.

 “작가라면 평생 살면서 사랑 이야기는 한 번 쓰지 않을까요. 사랑이라는 게 그냥 보기 좋고 아름답고 푸근한 건 아니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스산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TV드라마 등에서 쓰지 않는 아웃사이더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남들이 잘 다루지 않는 사랑과 대면하고 싶었다는, 즉 ‘청개구리 마음’이 발동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연애담이란, 살을 다 발라내면 ‘사랑에 빠지고, 헤어졌다’는 앙상한 뼈만 남을 뿐이다. 거기에다 그 사연이 너절한 장삼이사의 것이라면 누추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너덜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공통분모를 성찰하려는 작가의 성실한 태도가 빛난다.

 단편 ‘그 남자의 연애사’에서 그가 포착한 사랑의 순간은 이렇다. ‘저쪽에서 봄바람이 부는가 싶은데 그만 내 가슴속에 꽃이 피어버리는 것. 쌍방이 그러한 것. 이쪽에서 마늘을 까기 시작하는데 저쪽에는 벌써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 그것 또한 서로 그러한 것. 그게 사랑 아닌가.’

 ‘그 남자의 연애사’는 사랑에는 지지리도 박복한 한 사내의 이야기다. 마누라는 몸 풀러 친정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고 두 번째 사랑한 여자는 병에 걸린 사실을 숨긴 채 사내를 떠난 뒤 죽는다. 세 번째 여자는 양다리에 돈만 뜯어낸 뒤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네 번째 여자는 그냥 돈만 들고 튄다.

 다시 한 번 노래를 빌려 표현하자면 남녀만 바뀌었을 뿐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렇게 사랑과 운명에 연타석으로 뒤통수를 맞는 주인공에게 작가는 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숱한 이동과 이별의 마침표를 찍어줄 인연 하나가 바다 위 널빤지처럼 저만치에서 떠내려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오늘 많이 불었다고 해서 내일 바람이 안 부는 건 아닌 것처럼, 수많은 파도가 밀려와도 꼭 그 다음 파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그가 볼 때 섬은 술과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니 단편 ‘애생은 이렇게’ 속 주인공 애생의 남편이 모든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생이 “따져보면 사랑하는 대부분의 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섬은 물리적으로 외로운 곳이에요. 사람이 많이 살지 않고 동서남북이 바다인데다 겨울에는 매몰찬 바람이 불어오고…. 무료하고 쓸쓸할 때가 많죠.”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건망증 환자다. 뜨겁게 데인 상처에도 또다시 멈춰 서고야 만다. 그 어리석음을 그는 ‘작가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은 스페인어로 ‘아모르(amor)’입니다. ‘mor’는 ‘죽음’을, ‘a’는 ‘저항하다’를 뜻하죠.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에요. 사랑은 굶주린 개 앞에 던져진 상한 고깃덩어리와 같죠. 고깃덩어리를 덥석 문 뒤 허기가 가시고 포만감이 드는 듯하지만 한동안 끙끙 앓아야 하죠. 같은 순간이 와도 또 덥석 물고야 마는.”

하현옥 기자

◆한창훈(50)=1963년 전남 여수 출생.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나는 여기가 좋다』 등, 장편 『홍합』 『꽃의 나라』 등. 산문집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등. 한겨레문학상·요산문학상·허균문학작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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