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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견제 빠져 제왕적 금융 CEO 막기 역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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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신제윤

#얼마 전 퇴임한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전 회장은 지주 이사회 의장과 자회사인 우리은행 이사회 의장을 겸직했다. 금융지주 회장이 자신을 견제해야 할 이사회 의장인 동시에 자신이 감독해야 할 자회사 이사회 의장까지 겸했던 모순의 전형이었다. 정부는 민영화 추진을 위해 최고경영자(CEO)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부작용이 더 컸다. 이 전 회장은 주요 현안 결정권과 인사권을 거머쥔 ‘제왕적 CEO’였고, 이사회의 내부 견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KB금융지주는 사외이사들의 힘이 막강하다. 회장추천위원회 멤버 9명이 모두 사외이사들이다. 올해 3월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는 기존 사외이사 9명 중 8명이 유임됐다. 5년간 자리를 지켜온 함상문 이사 한 명이 교체됐을 뿐이다. 이전에도 일단 취임하면 5년을 못 채우고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주요 멤버는 기존 사외이사들이다. 사외이사들끼리 서로를 추천하면 임기 연장에 문제가 없는 구조다.

사외이사 보수 공개, 임기보장 없애

 ‘4대 천왕’이라 불릴 정도로 권한이 막강한 금융회사 CEO, 경영진 위에 군림하는 사외이사 카르텔. 금융위원회가 17일 이런 양극단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을 내놨다. “모든 수단을 강구해 금융회사 지배구조를 바꾸겠다”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취임 일성에 따라 민관 합동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가 두 달 만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방안에 따르면 우선 CEO에 대한 권한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이사회의 경영진 감독 책임·권한을 의무화한다. 사외이사 중심으로 이뤄진 이사회가 경영진 눈치만 보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판단에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연되는 ‘낙하산 논란’을 막기 위해 이사회가 정한 CEO 후보추천위원회가 후보군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중에서 CEO를 선출하도록 했다. TF위원장을 맡은 박경서(경영학) 고려대 교수는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예상 밖의 인물이 CEO로 오는 일이 없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성과와 관계없이 사외이사들에게 법적 최대 임기 5년을 보장하던 관행에도 제동을 걸기로 했다. 매년 내부 평가, 2년에 한 번씩 외부 평가를 받아 재선임에 반영하도록 권고하기로 한 것이다. 활동 내역에 따라 보수를 차등화한 뒤 이를 모두 공개하는 방안도 도입하기로 했다.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린 꼴”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지금까지 드러난 금융회사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렸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지엽적인 대책만 나열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근본적인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고 잘라 말했다.

 무엇보다 외부의 견제가 작동할 수 있는 방안이 제외된 게 문제로 꼽힌다. 덩치가 큰 금융지주사들은 모두 대주주나 지배주주가 없다. 이 때문에 경영자들이 자신의 회사처럼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었다. 이를 바꾸려면 지분이 많은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강화하거나 공익이사를 선임해 감시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이번 방안엔 이런 내용이 모두 빠졌다. 또 다른 견제 수단인 CEO·사외이사의 임기 제한도 무산됐다. 최근 논란이 된 우리금융의 ‘제왕적 CEO’와 KB금융의 ‘사외이사 카르텔’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우리·KB 지주의 지배구조는 지금과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3년간 적용 대상 없어 ‘사후약방문’

 오히려 CEO 견제를 앞세워 사외이사의 권한을 너무 강화해 놓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외이사들이 지주회장뿐 아니라 임원 추천까지 하도록 한 것이 한 사례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금융회사 전반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사외이사들이 계열사 CEO와 임원까지 추천하게 되면 책임경영이 사라지고 사외이사의 입김만 세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사후약방문’이란 비판도 있다. 제도 개선의 대상인 금융사들이 이미 차기 수장을 선출한 뒤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은 CEO인데 최근 선임된 회장들의 임기가 만료될 향후 3년간은 적용 대상이 없다”며 “이런저런 비판이 나오니 알맹이 없는 내용을 대책이라고 내놓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책의 효과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금융위가 이번 대책을 강제성이 없는 ‘원칙’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 대책을 따르지 않은 금융사들은 그 이유만 제시하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2010년 만들어져 사문화된 은행권 사외이사 모범규준처럼 될 가능성이 작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TF에서 민관 위원들이 각자 다른 의결을 조율하다 보니 파격적인 대책이 나오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경서 교수는 “지배구조를 너무 강하게 제한하면 부작용이 클 것 같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서 시장 자율성을 살리는 방안을 적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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