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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로, 늑대로 충무로 판 바꾼 김수현·송중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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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21면

어떤 작품이 흥행을 했을 때 주된 이유를 주연 배우에게서 찾게 된다면 우리는 그걸 ‘티켓 파워’라고 부른다. 개봉 열흘 만에 관객 400만 명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배우 김수현(25)이야말로 티켓 파워가 제대로 발휘된 경우다. 원작이 인기 웹툰이라는 점을 계산에 넣는다고 해도 김수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다.

컬처#: 영화계 세대교체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이후 여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누리고 있는 김수현의 영화 속 이미지가 주 소비층의 기대와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일하는 지능이 떨어지는 청년으로 위장,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 역인데 영화 절반이 지날 때까지 입고 나오는 유일한 옷은 초록색 트레이닝복이요, 더벅머리는 훤한 이마를 가린다. 거기다 하루 3회 넘어져 구르기,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용변 보기는 어떤가. 그런데 이 갖가지 ‘바보짓’이 의외로 큰 웃음을 일으킨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티켓 파워, 즉 관객 동원력을 입증한 배우는 몇 안 된다. 송강호·김윤석·설경구 등 주연급들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티켓 파워라고 보긴 힘들다는 시각이 많았다. 가령 뮤지컬의 조승우처럼 ‘그 배우가 나오면 무조건 보러 간다’는 절대적 지지자들을 확보해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제작비 규모에 비해 일부 배우들의 개런티가 지나치게 높다”는 업계의 지적이 나왔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김수현은 지지층인 10대 소녀들을 확실하게 극장으로 불러냈다. 영화 예매사이트 맥스무비가 개봉 첫 주 예매 관객 1만115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녀 동반은 45%나 됐다. 이 중 95%가 딸을 데리고 왔다. 김수현의 무대 인사가 예정된 회차는 전회 매진이었다. 맥스무비 김형호 실장은 “김수현의 티켓 파워는 10대들이 40대 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는 것, 앞으로 한국 영화 시장을 움직일 미래의 관객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분석했다.

김수현이 주목받는 이유는 ‘버블’ 논쟁이 있던 티켓 파워를 실증(實證)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충무로 신인류’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전까지 주연급 배우들은 주로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내공을 쌓다가 충무로로 옮겨왔다. 수년간의 배고픈 무명 시절을 오로지 연기가 좋아 버틴 게 송강호·설경구·김윤석 등 1960년대생들과 류승룡·정재영 등 70년대생들이다. 갈고닦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리얼한 일상연기가 이들의 셀링 포인트였다.

반면 ‘신인류’는 배고픔을 모른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헝그리 정신, 고진감래와 와신상담의 스토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김수현과 더불어 주목할 배우가 지난해 660여 만 관객을 동원한 ‘늑대소년’의 송중기(28)다. 이들이 이전 세대 배우들과 구분되는 첫 번째 요소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우월한’ 외모와 체격이다. 이전 세대 배우들과 선을 확실히 긋는 지점이다.

미국에서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모녀가 같이 관람하는 게 유행이었듯 이들도 엄마와 딸이 같이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데서 티켓 파워는 한층 확대된다. 게다가 ‘금발은 멍청하다’의 요새 버전이라 할 ‘잘생긴 배우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통념도 이들에겐 적용불가다. 잘나가는 젊은 배우라면 꺼릴 바보와 늑대 역을 선뜻 받아들였다는 데서 이들의 자신감이 읽힌다.

이들의 등장은 한국 스포츠의 박태환과 김연아, 클래식의 김선욱과 손열음 등에서 일찍이 우리가 경험했던 ‘패러다임의 전환’을 떠오르게 한다. ‘판’이 바뀐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산물인 그들을 보며 기성세대는 “대체 뭘 먹고 컸길래 저렇게 잘하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영 파워가 몰고 온 활력이 콘텐트의 질 향상, 해당 분야의 저변 확대,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기대해볼 차례다. 그러기 전에 티켓 파워가 발휘될 때마다 번번이 불거지는 영화의 완성도 논란 같은 건 좀 없어져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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