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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찌 잊으랴 사랑조차 사치였던 60년 전 그때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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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24면

젊은 세대들에게 60년 전의 6·25란 딴 세상 얘기다. 먼 유럽의 역사나 문화를 동경하면서도 이 땅의 역사는 쉽게 잊고 살아 간다. 딱딱한 교육적 루트로 관심을 호소해봤자 스마트폰 세대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문화를 통한 자연스러운 역사의식 고취가 절실한 이유다. 그러나 각종 문화 콘텐트도 외국 것을 가져다 코스프레하기 바쁜 것이 현실. 우리 정체성이 담긴 콘텐트 개발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문화융성’이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공허한 울림에 그칠 뿐이다.

디지로그 총체극 ‘흥남철수-정경숙 찾기’ 6월 25~26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흥남철수작전.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격적인 후퇴를 단행, 1950년 12월 14일부터 23일까지 열흘 동안 세계 전쟁사상 최대의 피난민을 해상수송한 역사적인 모멘텀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달 한·미 동맹 60주년 기념만찬에서 흥남 철수를 화두로 휴머니즘 혈맹을 강조하기도 했다. 만약 흥남 철수가 없었더라면 한국은 물론 세계 정세와 이후의 냉전구도가 크게 뒤바뀌었을 수도 있으며, 피난행렬 동참 여부에 따라 개인의 인생 또한 극과 극으로 갈렸다.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다.

잊혀져만 가는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 것이 이북5도청과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주최로 25~26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디지로그 총체극 ‘흥남철수-정경숙 찾기’다. 사실 이 연극은 연극계 원로로 1970년대 소극장운동을 주도했던 연극평론가 이태주(79) 교수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지난 연말 창덕궁 소극장에 올랐던 작품이다. 이 교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테마임에도 왜곡, 오도되고 있는 6·25의 진실을 직접 피부로 겪은 입장에서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십 년 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다. 이 교수는 “월남전을 소재로 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전 세계를 강타했는데 그보다 더 처참한 전쟁 6·25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활동이 너무나 미미하다”며 “연극이라는 방법이 진실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좋은 예술인데, 아무도 안 하니 내가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은 철저히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낙동강 전투, 인천 상륙작전, 장진호 격전과 흥남 철수,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전쟁상황에 말려들게 된 정경숙이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들여다본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단초는 30년 전 한 영자신문에 소개된 수필이었다. 전쟁으로 헤어진 젊은 연인이 포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는 실화에 기초해 ‘순수한 사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전쟁’을 테마로 대극장용 희곡을 2007년 탈고했다.

재정적 한계로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소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객석의 반응은 극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될 정도로 뜨거웠다. 픽션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무대화한 터라 감동은 더욱 생생했다. 우연히 공연을 관람한 이북5도청의 함경남북도 도지사들이 나섰다. 소규모로 끝낼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이 보고 역사의 비극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 여러 기업에 지원을 요청했고, 마침 6·25 회고사업을 진행 중인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사비를 털어 대극장 공연의 꿈이 실현됐다. 현재 거제·부산 공연도 계획 중이다.

오래된 전쟁을 소재로 원로 연극인이 지휘봉을 잡은 작품이니 흔한 리얼리즘 연극 아닐까 싶지만 ‘디지로그 총체극’을 표방한 점도 흥미롭다. ‘디지로그 총체극’이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제창한 21세기 신문명 키워드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의 발상에 근거한 개념으로, 세트를 최소화하고 첨단 영상기술을 활용하는 기법이다. 이태주 교수는 ‘연극에 음악·영상을 도입한 브레히트적인 서사극’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브레히트가 사회적 문제를 관객과 무대에서 토론하고자 서사극 형식을 취했듯 우리도 6·25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토론해 보자는 것이 그의 기획의도다.

“부제가 ‘정경숙 찾기’지만 정경숙은 6·25의 비극으로 죽은 400만 명 중 하나일 뿐 아직도 그 비극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죠. 이번 남북대화도 하루 만에 취소됐는데 이런 비극이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를 묻고 싶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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