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보며 꿈 키우던 나, 아이언맨 만들러 한국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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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완(5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공학과 교수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핵심 프로젝트인 차세대 우주왕복선 개발의 책임연구원이자 미 정부가 인정한 항공우주공학 브레인이 왜 한국에 있을까. 게다가 하필 왜 의과대학에 있을까.

여기에 하나 더. 의공학은 대체 뭔가. 그는 이런 궁금증을 예상했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600만 불의 사나이와 아이언맨을 만들러 한국에 왔다면 혹시 답이 될까요.”

김 교수가 몸담았던 NASA 랭리 연구소의 항법제어 분야는 17년간 연구원을 딱 한 명 뽑았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곳이다. 특히 그의 책임 아래에 있던 차세대 우주왕복선 핵심기술 개발팀은 전 세계 항공우주공학의 미래로 불렸다. 그런 그가 2010년 모교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김 교수는 “의공학은 아직 한국에서 낯선 분야 같아요. 쉽게 말하면 의학과 공학의 융합학문입니다. 인간 수명 연장을 위해 필요한 인공 장기나 난치병으로 알려진 질병 등을 고치기 위해 의학적 소견과 공학적 기술을 결합해 문제점을 해결하는 겁니다. 600만 불의 사나이와 아이언맨을 떠올리면 의공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위부터) 나사 랭리 연구소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김성완 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공학과 제자들과 찍은 사진. [사진 김성완]

김 교수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 의공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족했다. 김 교수도 처음부터 의공학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어릴 때 외화 ‘600만 불의 사나이’를 보며 드라마 속 배경인 NASA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기는 했다. 그래서 공대를 선택했다.

 공대의 위기를 말하는 요즘 분위기와 달리 당시는 공대의 인기가 높았다. 공대 중에서도 취업 등에 유리한 전자공학과를 모두 선호했다. 그런 시절 김 교수는 인기 없던 제어계측(현 의공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 이런 선택을 하자 주변 반응은 그야말로 “얘가 미쳤나” 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형은 특히 이해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한국은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탓인지 부모가 주신 몸을 버리고 로봇 팔다리와 인공 심장을 달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며 “하지만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뭐가 김 교수를 고집부리게 만든 걸까. 그는 TV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 내 인생을 바꾼 사건을 모두 TV에서 봤어요. 외화 ‘600만 불의 사나이’, 그리고 우주비행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중계 말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NASA와 미래공학이라는 데 있습니다. 막연히 공학도가 되면 NASA에 가고, 우주에 가고, 인조인간도 만들 수 있겠다 생각했죠. 난 원래 호기심 넘치던 녀석이었는데 이런 꿈이 더해지면서 매일 사건·사고를 끌고 다녔던 것 같아요.”

 엄마를 따라 간 전파상에서는 어른 몰래 필라멘트를 거꾸로 연결해 작은 폭발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군인 아버지를 따라 부대 근처 지뢰밭에 갔다가 ‘진짜 지뢰가 폭발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지뢰밭을 향해 돌을 던져 어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사건의 배후는 본인 표현대로 모두 호기심이었다. 김 교수는 “유독 호기심이 많아 뭐든 직접 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며 “지금도 궁금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궁금증을 바로 해결한다”고 말했다.

 이런 호기심은 그가 UCLA에서 자동제어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더 불이 붙었다. 자동제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는 에어컨 등이 대표적이다. 에어컨이 온도와 습도를 인식해 적정 온도와 습도를 스스로 유지하거나, 정해놓은 온도에 맞춰 온수가 나오는 것 등도 자동제어의 하나다.

 

1976년 TBC에서 방영한 외화 `600만불의 사나이` 의 주인공 오스틴 대령.

UCLA에서 박사과정을 할 당시 지도교수였던 알랑팔람 발라크리슈난 교수는 수학자답게 모든 현상을 증명하라고 주문했다. 호기심 넘치는 청년과 증명에 목숨 건 교수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모든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증명했다. 이런 습관은 지금까지도 그가 쉽게 안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됐다. 김 교수는 “나도 제자들에게 늘 새롭게 보고, 궁금해하고, 반드시 증명하라고 한다”며 “과학자의 기본은 호기심과 증명에 있다”고 말했다.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그는 NASA 프로젝트에 참여해 장학금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항공우주공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94년 세계 10위 방위산업체인 LAC(현 BAE) 책임연구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 취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NASA 장학생이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는 “이력서를 400통 넘게 썼다”며 “당시 신문에 나오는 모든 우주항공 관련 분야에 이력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곳이 바로 LAC였다. 김 교수는 “만일 한 번에 쉽게 NASA에 취직했다면 그토록 청춘을 불사르며 열정적으로 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24시간이 30시간인 듯 쪼개서 쉬지 않고 일했죠. 눈물 젖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내가 이렇게까지 미국에 있어야 하나 하는 후회를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꿈, 그러니까 NASA, 우주여행, 인조인간을 마음에 품고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연구실의 불을 끄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세계적 항공우주기업인 보잉사에서 차세대 우주왕복선 초기 개발팀 책임연구원으로 그를 불렀고, 머지않아 그의 꿈이던 NASA로 입성했다.

 그는 NASA 첫 출근을 이렇게 기억한다.

 “2000년 10월 23일 몇 번씩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은 채 머리를 빗고 또 빗었다. 연구소 정문에 걸린 NASA 현판을 보자 감동이 벅차올랐다. 대한민국 교육을 받고 자란 소년이 세계 최강 NASA 책임연구원으로 들어갔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더 많은 한국인에게 내가 누리는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반드시 항공우주 분야의 획을 긋는 대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이후 다양한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며 일생의 목표였던 차세대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NASA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그는 부러운 마음이 더 커졌다. 김 교수는 “NASA는 연구원을 위해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물론 연구원 자녀를 위한 교육까지 해주는 등 과학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곳”이라며 “우리도 왜 이런 국가 연구소가 없느냐는 생각에 질투심을 누르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즈음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그를 찾았다. “후진을 위해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NASA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주요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그에게 한국행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고국행을 택했다. NASA와 우주왕복선 연구라는 꿈은 어느 정도 실현한 만큼 이번엔 인조인간을 향한 꿈을 실현해 보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NASA에 사직서를 냈지만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당신 자리는 비워두겠다”며 받지 않았다. 귀국 3년 만인 올 초에야 정식 퇴직 처리됐다. 그러나 NASA는 아직도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며 “우리 모두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e메일을 보내온다고 한다.

 그는 현재 조이 스틱으로 조종하는 수술용 로봇 팔과 자동제모 로봇, 재활 로봇, 인체 속을 탐험하는 마이크로 비행체, 무중력 공간에서 이뤄지는 인체 반응 테스트, 한국인에게 맞는 인공 췌장 적응 연구, 암 조기 진단 등의 연구를 하고 있다.

 공학자이기에 앞서 같은 길을 걷는 아들을 둔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과학이 외면받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아 꿈을 꿀 수 있었고 호기심을 풀고자 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며 “한국 교육 현실은 아이의 호기심을 죽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올 때 가족 반대는 없었나.

 

김성완 박사는 해마다 가족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기록한다.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NASA는 과학자뿐 아니라 미국 고위 공무원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다. 최첨단 시설 속에서 최고 실력 인재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존경을 받는다. 또 가족을 위한 세심한 배려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몸담았던 보잉에 비해 연봉은 낮았지만 옮긴 걸 후회한 적 없다. 그리고 은퇴라는 개념이 없어 자신이 그만두지 않는 한 100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연봉이 적다고 볼 수도 없다. NASA에 10년 근무하면 부부가 쓰기에 남을 정도로 연금도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 오면 이런 혜택을 포기해야 하니 당연히 가족이 반대하지 않겠나. 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드니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 조국을 위해 뭔가 하고 싶고 내가 배운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더라. 한동안 미국에 있던 아내도 지난해 겨울 한국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아내도 한국 생활에 만족한다.”

-아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들었다.

 “아들 이름이 마루치다. 어릴 때 만화영화 ‘태권동자 마루치’를 보면서 아들 낳으면 이름을 마루치라고 짓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의미는 심오하다. 산마루의 마루와 사람을 가리키는 치, 즉 산 정상에 우뚝 선 사람이라는 의미다. 자기 분야에서 가장 우뚝 선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줬다. UC버클리 전기전자과에 다니는데 NASA에서 인턴 생활도 했다. 지금은 아마존닷컴에서 12주간 인턴을 하고 있다. 20대지만 자주 e메일을 보내고 가족 여행엔 늘 적극 동참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들과 함께 운동하고, 열심히 대화했던 게 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호기심이 성공의 요인이었던 것 같다. 호기심을 키우는 방법이 있을까.

 “한국 와서 가장 놀란 게 아이가 호기심으로 질문할 때 짜증 내고 화내는 부모가 많다는 거였다. 식당에서 뜨거운 국그릇이 식탁 위에서 주르륵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빠, 국그릇이 움직여, 살아 있나봐’라고 하자 부모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조용히 있으랬지’ 하고 윽박지르더라. 예외적인 게 아니다. 아주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다.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라는 게 아니라 아이가 호기심을 가질 때 부모는 함께 관심을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나처럼 호기심 때문에 사고 치던 아이가 NASA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님의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항상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고 치는 과정에서) 뭘 배웠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지 나무란 적은 없다. 특히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화를 낸 적은 더더욱 없다. 질문하는 아이에게 핀잔을 주는 건 아이의 호기심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이다. 설령 허무맹랑해도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좀 기울였으면 한다.”

-한국 학부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보유했던 전투기 숫자는 7만5000대다.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는 400대뿐이다. 우리나라가 항공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모든 부문에서 1등을 할 수는 없지만 미래 산업이자 국가 원동력이 되는 산업, 전 세계가 관심을 갖는 산업에는 끊임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적 지원 못지않게 학부모의 지원도 필요하다. 돈이 되지 않는 직업, 낯선 직업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아이가 원한다면 어떤 선택이든 응원해 주길 바란다. 특히 우주항공이나 의공학은 미래도 밝고 해외 취업문도 굉장히 넓은 분야 중 하나다. 많은 공학도가 나서야 우리나라가 항공우주 강국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아이를 의대생, 더 나아가 의대 교수로 키우는 것만 선호한다. 그런 부모를 설득하려면 의공학과가 의과대학 소속이라는 걸 강조하면 될까. 미래에는 의공학자 역할이 더 커질 테니 색안경은 내려놓고 미래에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다.”

김성완 1963년 51세 강원도 인제군
1969년 덕수초등학교 입학
1975년 보인중학교
1988년 명지고등학교
1981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198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제어계측(의공학) 전공
1988년 UCLA 대학원 전기공학부(자동제어) 전공
1994년 LAC(현 BAE) 책임연구원
1997년 보잉 책임연구원
2000~2011년 NASA(2013년 2월까지 휴직 상태) 책임연구원
2010년~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공학과 교수
 

사는 곳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원 기숙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주말)
근무하는 곳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운동하는 곳 : 연구원 기숙사 피트니스, 대학 내 교수 테니스 코트, 주말 골프
장 보는 곳 : 주말 집 앞 이마트
자주 가는 식당 : 동숭동 일식집 섭지코지, 동빙고동 한정식 오늘, 청담동 일식집 어등, 샤브샤브집 진상, 반포 한정식집 경복궁
 
가족
부인 : 장선미(47)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과
-1988년 노스럽 대학원 컴퓨터공학 전공
아들 : 김마루치(21) 그래프튼 베셀 초등학교- 그래프튼 중학교
- 그래프튼 고등학교-UC 버클리 전기전자 3학년

글=김소엽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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