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단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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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집문턱에 들어서자 반겨맞는 아내의 표정이 어쩐지 어두워 보인다. 그 얼굴에서 언뜻 퇴근길 발끝을 구르던 낙엽이 떠올랐다. 제법 싸늘한 바람이불어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벌써 또다시 가을이왔군. 이렇게 조금전에 중얼거렸던 참이었다. 김장·연탄·꼬마들의 의복 등등…아내의 얼굴엔 이런 겨우살이 준비가 걱정이되어 얼굴에 그늘져 나타난 것이 아닐까.
방에 들어서자 꼬마들이 우- 나에게 매다린다. 『아빠 이번 일요일엔 창경원 가요』막내 꼬마가 이렇게 졸라대는가 하면, 『창경원엔 지금 단풍이 한창이래』딸년도 한마디 거든다. 밥상을 앞에놓고 『그래 가자』하고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는 내입장이 안타깝기만 하다. 금년들어 안양천둑 운전사 살인사건을 비롯, 최근의 열차안 피살여인시체 유기사건에 이르기까지 사건에 쫒기다보니 나는 언제 여름이 지나가버렸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벌써 나무마다 싱싱하게 푸름을 자랑하던 녹음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겨울의 문턱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미 며칠전 시에선 과·서장회의를 열고 월동대책을 세우지 않았던가. 낙엽이 지는 계절이 오면 자연히 강력범죄도 늘게 마련. 여름엔 필요없었던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고 따뜻한 방이 필요하며 추위에 견딜수 있을만큼 많이 먹어야만 한다.
따라서 갑자기 돈이 드는 계절이 가을. 여기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킬수 없을때 그 돌파구가 범죄란 형태로 나타난다. 이 범죄에 대한 대책을 마련키 위해 골몰해야 하는것이 단풍지는 계절의 나의 직분. 그래서 나는 꼬마들의 간절한 요청에 자신있게 대답할수 없는것이다.
아예 가정의 월동준비엔 신경을 쓰수도없고, 내일 출근하면 형사배치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등의 일만으로 내마음이 벅차있다. 여보, 연탄이 떨어졌어요. 이런 아내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피로에 지쳐 누워버리는 나. 단풍이 드는 계절이라기보다 차라리 냉혹한 계절이라고나 해야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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