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의 기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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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9일은 한글날-. 이씨조선의 4대군주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하신지 이날로써 5백22주년이 된다.
정음이 제정됐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개국이래 거의 4천년이 지났건만, 그때까지도 고유 한국어 문자가 없어 한자어의 성운(성운)을 빈 이두(이두)가 국어표기의 유일한 수단이었고, 나라안에는 온통 오직 한자어만이 참말이요, 우리말은 상말이라 스스로 낮춰 부르던 문화적 사대주위가 일세를 풍미하고 있던 때였다. 대왕께서는 이 부끄러운 문화적 노예근성을 깊이 통탄하고, 만민이 모두 쉽게 익혀 쓸 수 있고 일용(일용)에도 편리한 우리 글을 스스로 제정, 이를 강제적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경·민족설화등의 국역본 간행이라는 문화적 수단을 통해 보급시키려고 했던 것이니 이고사는 지금 우러러보아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비록 제왕의 힘을 가졌다고는 하나, 한나라 언어 문자를 불과30년미만의 짧은 기간안에 독창적으로 창조해 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제정된 28개의 문자(현재는 24자)가 오늘날의 학문적 수준으로 볼때에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과학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역사의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오늘 한글날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결코 이러한 과거적인 사실에 대한「노스탤지어」식 자랑만으로써 이날을 허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매년 한글날을 맞을 때마다 우리사회 안에서는 이러한 과거적인 사랑에 도취하는「징고이즘」이 성행하거나, 성급한 한글전용론이 되풀이되곤 하였다. 그러나 한글반포 이후 거의 5백30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한글 전용이 안되고 있는 궁극적 원인의 분석이나 그 해결책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규명을 위한 노력은 사실상 외면을 당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한글전용이 가져다 줄 사무능률의 증진이나 인쇄기술상의 편리등은 물론, 외면할 수 없다하더라도 해방이후 과학적인 연구나 신중한 사전준비 없이 추진된 극단론자들의 성급한 한글전용운동이 국민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 깊은 성찰을 해야할 싯점에 놓여 있다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문화에 깊이 동화된 한자문화의 영향을 어떻게 보존·전승할까도 큰 문제이거니와, 근5백년간 근대화 대열에서 뒤지고 있던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엄청난 사화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제 다른 선진국가 못지 않게 복잡화하고 다양화한 정치·경제·문화활동등 전반에 걸친 국민생활의 전국면을「커버」할 수 있는 언어문자의 기능이 성급한 한글전용론만으로써 해결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전체의 향상을 위해 우리는 한글이 갖는 막중한 역할을 누구보다도 중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날 한글날을, 장차 이루어질 이상적인 언어생활을 위한 준비를 위해 우선 시대감각에 맞는 표준말의 개발, 맞춤법의 단순·단일화, 새로운 한글식 학술어, 시사용어의 제정, 인쇄자체의 개량 등을 위한 차분한 준비를 다짐하는 날로 기념하여야 할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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