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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공간서 빛이 바랜 ‘하루키 월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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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24면

우리는 통상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 왔다. 거의 보진 못했다. 머릿속으로 그려 왔을 뿐이다. 대중적 인기를 끈 문학작품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주얼로 구현되는 세상이지만 유독 하루키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토니 다키타니’ 등 단편과 초기작인 ‘노르웨이의 숲’이 최근 영화화됐을 뿐이다.

연극 ‘해변의 카프카’, 5월 4일~6월 16일 동숭아트센터

하루키가 누군가. 1980년대 이후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특유의 문체로 그려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온 대중적인 작가면서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가다. 2010년 센세이션을 일으킨 『1Q84』 이후 3년 만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를 최근 내놓고 초판만 60만 부를 찍는 등 여전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활자로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하루키 소설의 비주얼화가 드문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의 매력이 음악에 가깝게 조탁된 언어구사에 의한 치밀한 심리 묘사에 있으며,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마법적 리얼리즘의 하루키 월드를 실물로 구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키 작품이 처음으로 국내 연극무대에 올랐다. 2008년 미국 연출가 스티븐 갈라티가 각색해 초연한 ‘해변의 카프카’다. 지난해 일본의 세계적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가 역수입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젊은 연기파 배우 야기라 유야 주연으로 무려 3시간45분짜리 무대를 꾸며 화제를 모았다. 영화보다 제약이 많은 무대 위에 세워진 하루키 월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실 하루키를 읽는다는 것은 연극을 보는 경험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책장을 넘길 때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낯선 상황에 놓인 자신을 그려보며 영혼의 문이 살며시 열리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무대언어로 낯설게 구현된 연극세계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현실세계를 돌아보며 그 숨겨진 본질을 발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잘 작곡된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듯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하루키 월드가 연출적 상상력에 의해 어떤 무대 매커니즘으로 구현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무대는 원작의 상상력을 재해석하지 못한 단순 시각화에 그쳤다. 2002년 출간된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당시 하루키의 23년 문학 인생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방황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가는 소년의 성장소설인 동시에 수많은 상징적 인물들이 삶에 대한 통찰을 우주적 스케일로 제시하는 내면의 대하드라마다. 두 개의 세계가 교차하다 하나로 맞물리며 내적 갈등이 해결되는 원작의 구조나 조니 워커, 커널 샌더스 같은 상징적 인물의 등장이 그 자체로 이미 연극적이다.

그러나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한 김미혜 한양대 교수가 털어놓았듯 미국인에 의해 각색된 하루키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아우르는 동양적 우주관이 배제된 논리적인 서사에 머물렀고, 원작의 신비로움과 환상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루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기는 아버지의 저주에서 벗어나려 도망친 15세 소년 카프카의 여정, 그리고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고 그림자가 반쪽뿐이며 9세 지능을 가진 노인 나카타의 여정이라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우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개된다.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틈에 자리한 미궁의 ‘입구’를 열고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는 신비한 여정이 원작에선 두 세계의 연관성을 암시하며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선 단순병렬을 벗어나지 못한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이라면 수많은 장면전환이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하기보단 생뚱맞은 장면의 나열로 보이기 쉬울 듯하다.

하루키 특유의 관념적 언어의 향연 또한 이런 거친 압축 방식에 생명력을 잃는다. 방대한 하루키 월드는 종종 원작 내에서도 수습이 잘 안 되곤 한다. 그러나 하나의 테마나 메시지가 아니라 넓고도 깊은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영혼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얻는 것이 하루키 월드의 묘미라고 할 때, 무대 위에서 하루키를 만나는 일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스스로 미로를 헤쳐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하루키 월드의 태생적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남이 그려준 하루키 월드는 내 추억 속에 각인된 시공간을 누군가 심심하게 그려놓은 풍경화로 확인하는 것처럼 매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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