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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 훈장 … 현대식 정치 도입한 ‘민중의 남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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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24면

윌슨 총리(가운데)가 1965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은 비틀스 멤버들과 만나고 있다. [사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그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와 나라를 이룩했으며 세상을 아주 다르게 바꿔놨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⑧ 해럴드 윌슨

노동당 소속으로 1964~70년과 74~76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해럴드 윌슨(1916~95)에 대한 같은 당 소속 후배 총리 토니 블레어의 칭송이다. 블레어는 총리 시절인 99년 윌슨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그를 ‘창조적인 정치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윌슨은 영국 정계에 현대적인 정치문화를 도입한 리더로 통한다. 야당 당수 시절부터 그는 TV를 활용한 미디어 정치를 통해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했다. 그는 스스로를 ‘민중의 남자(man of the people)’라고 자칭하면서 권위적이고 관료적으로 보이는 보수당 정치인들과 철저히 차별화된 이미지를 과시했다. 이를 위해 치밀한 홍보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했다. 예컨대 그는 시가를 즐겨 피웠지만 항상 파이프를 물고 다녔다. 또 고향인 요크에서 생산되는 제넥스 상표의 레인코트를 입고 다녔다. 영국의 보통 남자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서민이 즐기는 HP 소스를 이용해 간단한 요리를 손수 하거나 고향 축구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TV 화면에 내보내며 서민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는 약사인 아버지 때부터 표준 영어 억양을 사용하는 중·상류 계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정치 현안을 토론할 때는 노동계층이 쓰는 속어와 억양으로 말해 대중적 친밀감을 유도했다. 부유층이 선호하는 유럽 대륙의 유명 관광지 대신 여름마다 국내의 한적한 섬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한마디로 낮은 곳과 보통사람에게 다가서는 행보를 펼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국을 신속히 현대화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런 윌슨에게 영국 유권자들은 신선함과 희망을 느꼈다. 63년 야당인 노동당 대표를 맡은 그는 불과 1년 남짓 만에 보수당의 13년 집권을 저지하고 정권을 탈환했다.

총리가 된 그는 노련하고 통 큰 리더십으로 매스컴을 놀라게 했다. 당내 경선에서 격렬하게 맞섰던 정적 조지 브라운과 제임스 캘러헌(훗날 그의 후임 총리)을 각료로 중용한 것이다. ‘노동당 내부의 고질적인 좌우 분열 때문에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허용했다’고 주장하며 당내 단합에 주력한 것이다. 그 덕에 그가 노동당 당수로서 치른 다섯 차례의 선거에서 네 차례나 승리했다. 뛰어난 대중적 감각을 앞세운 선거의 귀재로 통했다. 전통적으로 당 내분이 심했던 노동당은 그가 당수를 맡았던 기간 중 단결을 유지했다.

뛰어난 정치 전략가이자 선거의 귀재
윌슨은 ‘청년 정치’에 주력했다. 젊은이들의 관심사와 트렌드를 파악해 이를 정치 현장에 적극 반영한 것이다.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던 비틀스에게 65년 대영제국 5등급 훈장(MBE·Memb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주도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추천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윌슨은 젊은 세대로부터 뭔가 통하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청년 문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층으로부턴 ‘훈장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는 곧 수그러들었다. 윌슨은 비틀스에 의해 촉발된 ‘뉴브리튼’이라는 영국민의 문화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한편 문화산업을 영국의 신성장산업으로 주목했다.

그래선지 윌슨은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로 통한다. 문화산업은 21세기 영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주요 산업의 하나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주요 서비스산업인 교육산업의 경쟁력도 강화해 나갔다. 이는 산업 정책 차원이라기보다 사회적 평등을 위한 투자로부터 출발했다. 교육 기회의 평등을 강화해 사회안정을 유지하려는 게 윌슨의 원래 취지였다. 분배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집권 초기 27개에 불과하던 종합대학은 집권 1기 끝 무렵인 70년까지 44개로 늘어났다. 여기에 170개 이상의 교원대학과 기술대학을 설립해 대학교육을 대폭 확대했다. 그의 총리 재임 중 교육 분야는 국방을 제치고 사회복지에 이어 둘째로 많은 국가 예산을 차지하게 됐다. 주목할 대목은 69년 세계 최고의 개방형 방송통신대학으로 평가받는 오픈유니버시티를 설립해 나이·지역·경제력에 상관없이 대학교육 접근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대학교육이 대중화하면서 교육 분야는 신성장산업으로 각광받았다.

윌슨 시대에 영국인들의 최고 관심사는 당연히 경제였다. 경제성장률이 점차 떨어지고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영국은 ‘유럽의 병자’로 전락해 갔기 때문이다. 윌슨은 ‘기술혁명의 하얀 열기’라고 부른 혁신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영국판 ‘창조경제’ 전략이라 할 만하다. 이를 위해 산업 현대화를 지원할 기술부와 장기 경제계획을 주도할 경제부를 각각 신설해 연 3.8%의 성장률을 목표로 한 국가발전계획을 수립했다. 물가·임금을 관리할 물가소득청도 신설했다. 파운드화 약세를 촉발한 예산 적자를 메우려고 군사비 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64~65년엔 국방비와 방위전략을 대대적으로 재조정했다. 67년 중동전 발생으로 경제난이 심화되자 수에즈 운하 동쪽에 있던 영국의 군사기지들을 과감하게 폐쇄했다. 껍질만 남아 있던 제국(帝國)의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고 절감한 군사비를 경제 살리기에 투입한 것이다. 이런 정책들이 약발을 받아 국민소득과 생활수준은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69년 국제수지도 흑자로 돌아서 파운드화 가치는 안정을 되찾았다.

해럴드 윌슨 총리(왼쪽)가 취임 두 달 뒤인 1964년 12월 미국 백악관에서 린든 존슨 미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윌슨은 베트남전 참전을 요청받았으나 완곡히 거절했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평등 복지보다 교육 통한 기회 균등 추구
윌슨은 대외관계에선 변화를 최소화해 국익을 도모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강력한 동맹이 된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중시하는 보수당의 외교정책 틀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면서 이념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미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베트남과 중동에는 직접 개입과 파병을 피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간접 지원하고,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을 음양으로 도우며 워싱턴 쪽과 얼굴 붉히는 사태를 막으면서다. 이로 인해 윌슨은 경제적·외교적 안정과 국익을 확대할 수 있었다. 윌슨의 전기작가인 필립 지글러는 이를 “영국 국익과 대미(對美) 신의 사이에서 ‘정직한 브로커’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 당내 반대파를 설득해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과감하게 추진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이나 영연방 국가와의 교역 비중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67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또다시 반대하면서 EEC 가입은 무산됐다. 영국은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총리 시절인 73년 1월 EEC에 가입했는데 74년 다시 총리가 된 윌슨은 가입 조건을 재협상한 뒤 75년 6월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국내외의 격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럽 대륙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임금인상 자제와 복지·고용 대타협 시도
윌슨의 리더십은 영국을 현대적인 관용사회(Permissive Society)로 만들었다. 소장파 의원들의 의견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각종 검열을 완화하고 이혼 절차를 쉽게 했다. 낙태·동성애 허용, 사형제 폐지 등 각종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또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법률로 금지했다. 70년에는 남녀 간 동등 보수와 대우를 법으로 보장하면서 여성인력을 노동시장으로 유도해냈다. 이런 정책들은 이후 전 세계 국가의 모범이 됐다. 문제는 영국이 복지국가에 더해 관용사회로 가게 되면서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가 갈수록 희미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윌슨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게 노사관계였다. 67~69년에는 파업 발생 횟수가 50%나 증가했다. 물가가 계속 오르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시위가 늘고 노사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윌슨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노동당의 표밭이라고 해서 무조건 노조 편을 들지 않았다. 나라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일종의 대타협을 통한 사회계약 방식을 추진했다. 노동자에게 복지 개선과 취업 안정을 약속하는 대신 임금인상 자제를 호소한 것이다. 노동당 내 일부 좌파는 노동자 편을 들자고 주장했지만 윌슨은 국익 차원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대타협을 추구했다. 투표권을 가진 대중이 급진주의를 멀리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윌슨은 노사관계의 합리적인 룰이 정착되도록 노력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도너번 위원회를 만들어 아무 절차나 규정 없이 마구잡이로 일으키던 파업에 대해 법정 절차를 거쳐야 가능하도록 새로운 관행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파업 요건을 제한하고, 파업 전 반드시 냉각기를 거치도록 했고, 파업을 하려면 조합원 비밀투표를 거치게 한 것이다. 훗날 그가 제시한 파업 관련 규정은 노사관계의 글로벌 모델로 정착했다. 하지만 윌슨은 노조의 강력한 반발 앞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가의 자살’이라는 비난을 듣던 노조 파업사태 때문에 영국 경제가 몰락해 가는 걸 온전히 막지 못했다.

옥스퍼드대 강사 출신인 윌슨은 젊을 때 물불 안 가리는 좌파 정치인이었다. 클레멘트 애틀리 정권(45~51) 시절인 50년 6·25전쟁 참전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총리가 틀니와 돋보기 예산을 깎자 통상장관직 사표를 냈을 정도다. 하지만 총리가 된 이후에는 좌우를 아우르는 현실적인 리더십을 추구했다. 노동당의 구호였던 산업 국유화는 윌슨 시절 조용히 사라졌다. 당 내부에선 윌슨의 총리 시절을 현대 진보정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희망과 진화의 시기로 기억한다.

그는 76년 갑자기 총리에서 물러났다. 60세가 되면 그만두려 했다는 뜻과 함께 부인이 병을 앓아 힘들어 한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나중에 알츠하이머 때문에 자신의 총리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자진 사퇴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 지도자의 건강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글 싣는 순서

1 솔즈베리 경(보수당)
고립정책과 점진적 개혁 추진

2 허버트 애스퀴스(1908~16·자유당)
해군 증강과 복지정책 추진

3 데이비드 로이드조지(1916~22·자유당)
1차대전 승리 이끌고 복지국가 틀 마련

4 네빌 체임벌린(1937~40·보수당)
협상 통해 전쟁 막으려다 실패

5 윈스턴 처칠(1940~45, 1951~55·보수당)
피와 땀과 눈물의 단결 리더십

6 클레멘트 애틀리(1945~51·노동당)
미국과 손잡은 중도좌파 실용주의

7 해럴드 맥밀런(1957~63·보수당)
1차대전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8 해럴드 윌슨(1964~70, 1974~76·노동당)
정적을 각료로 기용하고 경제 회생

9 마거릿 대처(1979~90·보수당)
영국 복지병 치유한 철의 리더십

10 토니 블레어(1997~2007·노동당)
‘쿨 브리태니아’로 창의 리더십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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