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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21호는 김유신묘|김상기박사의 「이설반증」을 들어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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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주의 서악봉우리에있는 사적21호 김유신묘는 김유신의 묘가 아니다』 -최근 모지상에 이병렴박사의 주장이 발표되자 학계를 비룻롯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김해김씨는 조상산소를 잘못받든셈이되고, 또 문화재위원회는 지정유적을 그릇고증한 결과가된다. 그러나 문화재위원장 김상기박사는 반증을 들어 다음과같이 말한다. 김유신묘에 대한 이설은 구체적으로·논문이 나온뒤 봐야 알겠으나 지금까지 알려진바로는 선조에대한 모독이며 결코 새로운 학설이랄것도없다.
그러한주장은 앞서 일본학자가 종래의 기록을 부인한바있으며 그것을 부연하여 발표한데 불과하다.
이박사는 지금 김인문의 묘가 김유신묘이고 지금의 김유신묘는 딴왕능이라 주장하고 몇가지 이유를 들었다.
①봉분주위에 병석과 십이지석이 있는데 당시에그런게 있을수 없다. ②삼국통일초까지 분묘는 평지에 있었다. ③김인문비의 비신 촉이 지금 김인문묘주변에 있는 거북(비좌혈)과 안맞는다. ④김인문묘의 형식이 이웃 무열삼능과 유사한양식으로 돼있다. ⑤동경잡기에 경주에 있어서 기우촌의 하나로 각간묘를들고 있었다. ⑥삼국사기에 김유신묘에는 비를 세웠다는데 비가 없지않은가. ⑦임진·병자양란을거치는동안 바꿔 기억하게됐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추봉됐으니만큼 삼능의 형식을 갖출것은 당연한일이며 삼국유사에도「왕릉」이라 호칭했음을 본다. 따라서 거기 병석과 십이지석및 석난간이 안강·흥덕왕능의 그것과 시대성이 일치함도 당연한 결과이다.
삼국시대의 무덤은 평지나 산밑에 있다른 점도 김유신보다 2대앞서는 선덕왕능이 더높은 낭산위에 있음과 견주어 어떻게 그런단정이 가능할까. 삼국유사에 『흥호왕능은 서산의 모지사북쪽의 동으로 달리는 봉우리에있다』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모지사북쪽봉오리에있다』고하면서 경주의 고분으로서 혁거세와 김유신의 두묘를들고 있음은 김유신묘가 기에 주의 광릉가운데 가장 석물이 완비돼있기때문일것이다.
여지승람에도 「재서악」이란 귀절이 보이며 김인문과 김양의묘 가 평원지대의 한 영역안에있다고 설명돼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출장우김산원」이라하였는데 지금도 서악을일컬어 「예 쇠두미」 라함은 곧 김산원임을 알수있다.
최근 경주박물관이 실측한 바로는 꼭맞아 현재의 김인문묘가 그대로임을 확증했다. 그 묘가무열왕능과 같은 수법임은 그들이 부자간이므로 당연하게 풀이된다.
옛 기록의 각간기라는말을 하필 김인문묘로 보려는 견해는 납득 안되는 일이며, 특히 지금의김유신묘에 비가 있었던 흔적도 없지않느냐는 점에는 그의 학문적 자세에까지 의심이 간다.
왕능에 원래 있었을것인데 지금 없어진 예는 허다한 일이며 수십년전에 귀부를 봤다는 소문도 있으니만큼 땅속에 파묻혀있을 수도 있다. 설사 김인문묘의 비신과 거북이 안맞는다 하더라도 그 거북을 기유신묘의 것야라 할 근거는 없다.
더구나 김유신의 후손이 전란을 겪는동안 조상의 무덤을 착각했을지 모른다는 것은 있을수없다. 1천수백년간 지켜오는 조상의 산소를 착각, 바꿨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김유신묘에 대한 이박사의 이설은 50여년전일인 관야정교수가 들추었던 테두리를 벗어나지못한다. 그는 조선미술사에서 『종래의 김인문 묘는 몇가지 이유로 김유신묘로 보는 의견에 찬성한다』고 하면서 문제의 귀부에 대해서도 『김양것으로 보기보담 김유신묘의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일인들이 괜히 꼬집어 보려는 태도이며 우리는 그동안 그에 대해 충분히 입증하여 새삼 논의할것이없는 사실임을 거듭다짐해둔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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