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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리포트] 성폭력 피해자 지킴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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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성폭력 피해자는 이중으로 서럽다.산부인과에서 진료를 거부당하는 경우마저 있다. 진단서를 발급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 걸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단법인 '한국 성폭력 위기센터'(서울 구로동.02-854-0077)는 피해 상담과 진료를 한꺼번에 해주는 국내의 유일한 기관이다. 이곳에는 여성을 지키는 여성들이 있다.

지난 6일 오후 2시 상담실 입구.30대 여성이 종이를 꺼내더니 볼펜으로 글을 적어나갔다. "상담하러 왔습니다. 경찰서에서 가보라고 해서." 그 전날 성폭행을 당한 청각장애우였다.

경찰에서 "진단서를 끊어오라"는 말을 듣고 어렵사리 찾아온 것이다. 그는 우선 센터내 진료실로 안내됐다.

진료는 센터 상임대표 박금자(50)씨가 맡았다. 그는 센터 아래 층에서 개업 중인 산부인과 의사다. 박대표는 그 자리에서 상처를 살피고 응급 피임조치를 시작했다.

증거 사진을 찍고 진단서 발부까지 마쳤다. 그후엔 필답 상담이 1시간여 진행됐다. 사건 개요를 파악한 뒤 앞으로의 법적 대처요령, 법률구호 기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센터는 2001년에 설립됐다. 박대표의 의원이 있는 건물 3, 4층에 사무실과 상담실.진료실.교육관을 마련했다.

박대표는 "개업의로 있다 보니 여성들이 성폭력으로 인해 질병에 걸리고 임신.낙태를 하고 미혼모가 되는 등 악순환을 겪는 걸 너무나 많이 봤다"며 "이런 일을 막으려면 성폭력 예방 교육과 신속한 사후 조치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립 동기를 밝혔다.

센터는 ▶유아 성교육▶학부모 교육▶성폭력 관련 세미나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운영은 박대표와 김현정(32)사무국장, 이은미(29).김윤정(26)간사, 자원봉사자 최성원(41)씨와 간호사 1명 등 6명의 여성들이 한다. 김국장은 대학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뒤 여러 여성단체에서 일해왔다.

상담을 맡고 있는 그는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인지 성폭행 사실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려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는 일생 동안 정신적 후유증을 겪기도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성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며 "지금까지는 몇몇 여성단체가 문제를 떠맡아왔지만 모든 사람이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윤정 간사는 "피해자들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적이 많다"면서 "여성을 성적인 학대와 폭력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적 편견을 우리 사회에서 없애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이들이지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단다.

미혼인 이은미 간사는 "맞선이 들어왔는데 내 직업을 알게 된 상대방이 만나지 않겠다고 해 무산된 일도 있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는 이 일을 택한 뒤 한동안 가족의 반대에 시달렸다.

자원봉사자 崔씨는 전업주부로 있다가 아는 사람 소개로 상담원 교육을 받고 입문한 사례. "피를 흘리던 어린이 피해자들을 특히 잊을 수 없다"면서 "상담 교육을 더 받고 경험도 쌓아 피해자와 그 가족을 제대로 돕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朴원장은 "가해자가 '네 덕에 콩밥 잘 먹었다'고 협박하는가 하면 '진단서를 허위로 끊어줬다'며 고소를 해오기도 한다.

성폭행을 당해 에이즈에 감염된 피해자를 보고는 사흘간 밥을 못먹은 일도 있다"고 소개한 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모두가 함께 하면 더욱 좋겠다"고 말했다.

여성을 위해 일하는 여성은 이들 외에도 많다. 서울 여성의 전화(02-2263-6465.여성 긴급 전화 1366) 등 전국의 성폭력 상담소는 1백여곳에 달한다.

성폭력 전담 기관으로는 가장 오래된 '한국성폭력상담소(02-338-2890)'에서는 40여명의 여성이 일하고 있다. 상담.의료.법률 지원 등을 해주는 곳이다. 열림터(02-338-2890) 등 성폭력 피해자 보호 시설도 전국에 10여개소가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보연(27)간사는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10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며 "피해자인 여성의 시각으로 법률을 재정비하는 등 근본적인 법.제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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