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외국인 근로자 그들이 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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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인쇄판 재생업체인 세진산업(경기도 김포시)의 정남만(47) 관리이사는 지난 연말 반가운 편지를 받았다.

2001년 가을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필리핀으로 돌아간 산업연수생 제로니모 에드가르도(36)가 보낸 감사편지였다.

한국에서 쌓은 경험과 돈으로 고국에서 창업에 성공, 어엿한 사장이 된 에드가르도는 편지에서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결심했던 해외 취업길에 두려움이 많았지만 회사가 기술도 가르쳐주고 따뜻하게 배려해줬다'며 '내 인생을 바꾸게 해준 세진산업 임직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적었다.

그는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한국인들로부터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는 근성을 배웠다'며 한국 근로자들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코리언 드림'을 일궈낸 에드가르도는 현재 고향에서 식료품 가게와 작은 오토바이 택시회사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편지를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정이사는 "늘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일했던 에드가르도가 고국에서 창업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치 자식이 성공한 것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정이사는 공장직원들에게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을 가족처럼 대해 주라고 늘 강조한다. 본인이 20여년전 리비아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힘들게 일했던 경험이 있어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입 연수생들에게는 전담 기술자를 붙여줘 기술을 빨리 익히게 하고, 회식에도 자주 참가시켜 일체감을 갖도록 한다.

또 명절 때 연수생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연수생이 생일을 맞으면 파티를 열어주는 등 향수병을 앓지 않도록 배려한다. 근무시간, 야근수당 등 근로조건상 동등한 처우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병배(46) 공장장은 "가족처럼 여기던 연수생들이 귀국할 때가 되면 서운한 감정이 든다"며 "이 곳을 거쳐간 10여명의 연수생이 고국에서 모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량용 냉난방장치 제조업체인 ㈜두원공조(충남 아산시)의 성기천(55) 사장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있기에 외국인 연수생들에 대한 이해가 깊다. 지난해 6월 카자흐스탄 연수생 아리스바예프 쿠아니쉬(33)가 급성 담석증에 걸려 두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공장임직원이 병원비 1백20여만원을 모아 전달한 것도 그의 제안이었다.

병원비뿐만 아니라 지급하지 않아도 될 입원기간의 연수수당도 1백% 지급했다. 공장직원들의 따뜻한 동료애 덕분에 쿠아니쉬는 병이 완치돼 작업라인에서 활기차게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신입 외국인 연수생들이 적성에 맞는 근무지를 찾을 수 있도록 순환근무를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개월간 모든 생산라인을 돌며 개인별 적성을 파악한 뒤 적합한 작업공정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명절이나 생일, 크리스마스 때 회사에서 파티를 열어주는 것은 물론 인근 현충사, 아산온천 등에 관광 가서 찍은 사진도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내주고 있다.

성사장은 "외지에서 고생하는 근로자들을 한국인 특유의 정으로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며 "이같은 배려가 결국 생산성 향상은 물론 국가 이미지 제고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1년7개월째 근무하고 있는 에밀레오 나바오(25.필리핀)는 "회사가 고국의 가족들을 위해 이 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줬을 때 너무 고마웠다"며 "형에게도 한국에 산업연수 오라고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 따뜻한 배려를 하는 기업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제조업의 구인난이 심화되면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처우를 개선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 한국 근로자 못지않은 권익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지난해 8월 외국인 산업연수생 정원을 8만명에서 13만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했지만, 현장에서 요구하는 수요(약 20만명)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산업연수생들이 근무지를 이탈,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고 있어 이들의 인권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상태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들은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이탈을 막고,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처우개선에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20여명의 산업연수생을 활용한 ㈜금호 N.T(경남 김해시)는 외국인 연수생들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회사가 비용을 전액 부담해 본국에 1주일간 휴가를 보내주고 있다. 또한 3개월이 지난 연수생들에 대해 매달 10만원씩 상여금 명목으로 적금을 넣어주고 만기가 되면 지급해 근로의욕을 높이고 있다.

97년에는 필리핀 연수생이 입국한지 3개월만에 홍콩에 취업해 있는 부인이 아파 발을 동동 구르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길제(61) 사장이 연수생을 데리고 홍콩에 가 병원비를 전달하고 온 적도 있다.

조사장은 "외국인 연수생을 같은 가족으로 여겨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겪으면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하고 있다"며 "일부 직원들은 자비로 연수생들에게 문화 유적지를 관광시켜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북 구미시의 대광전자㈜는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이 각자 식성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식단을 뷔페식으로 바꿨다. 신성델타테크㈜는 2년 이상 근속자들에게 고국방문 20일 휴가를 주고 교통비의 50%를 지원해준다.

㈜금성정공은 연수생의 근무기간에 상관없이 급여.작업시간.복리후생 등 처우를 내국인과 동일하게 한다. ㈜호남샤니는 해외송금.건강의료 상담 등에 관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근로자 종합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태산정밀은 이슬람 교도인 인도네시아 연수생들이 금식기간인 라마단 때 근무를 일찍 마칠 수 있도록 작업시간을 조정하고, 식사도 원하는 시간에 들 수 있게 하는 등 종교.문화적인 배려도 하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연수지원부 김승환 부장은 "중소기업들의 제조인력 구인난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작업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이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며 "외국인 근로자들과의 화합은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져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글=정현목 기자, 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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