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원 안팎 빚 5년간 못 갚은 저소득층이 대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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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야간 택시 기사인 김모(58)씨는 16년 전 한 캐피털회사에서 빌린 1000만원 때문에 지금까지 신용불량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실직을 하면서 연체가 시작된 게 원인이었다. 택시 운전을 하며 돈을 갚으려 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체이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채권추심업체의 빚 독촉을 피해 1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런 김씨에게 회생의 길이 열렸다. 지난달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이자 전액과 원금 70%를 탕감받고, 남은 300만원을 2년간 나눠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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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행복기금 수혜 대상자의 면면이 공개됐다. 1369만원의 빚을 5년8개월간 갚지 못한 이들이 행복기금 대상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연평균 소득은 678만원이었다. 국민행복기금 사무국이 본 접수 한 달(5월 2일 시작)을 맞아 7만4937명의 대상자 중 5733명을 무작위로 골라 조사한 결과다. 행복기금 대상자의 통계가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행복기금 관계자는 “대다수는 1000만원 안팎의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장기간 신용불량자로 살아온 저소득층”이라며 “행복기금 탕감을 노리고 빚을 갚지 않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채무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연체 기간이 1년 미만인 채무자는 전체의 8.9%로 가장 적은 반면 6년 이상 채무자가 39.6%로 가장 많다. 장기채무자들은 보통 은행 대출을 받았다가 갚지 못해 연 이자가 30%를 넘는 2금융권과 대부업체의 고금리 대출을 끌어 쓴 경우가 많다. 돈을 못 받은 금융회사가 추심업체에 채권을 헐값에 팔아 넘기면 빚 독촉의 강도는 훨씬 강해진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담당자는 “추심업체들은 10명 중 1명한테만 원금을 받아내도 이익이기 때문에 끈질기게 채무자를 쫓아다닌다”며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숨어 다니는 이들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역대 정권에서 시행한 한마음금융(2004년), 희망모아(2005년), 신용회복기금(2008년)과 같은 일회성 빚 탕감 프로그램도 이들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중은행이 보유한 채권을 대상으로 채무를 조정했기 때문에 채권이 이미 오래전에 대부업체나 추심업체에 팔려 나간 경우는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반면 행복기금은 채무 조정 대상의 범위를 확 넓혀 장기채무자들이 수혜를 볼 수 있게 했다. 행복기금은 모든 시중은행·저축은행을 포함해 대부업체 133곳 등 총 4181개의 협약 금융회사가 보유한 채권이 채무조정 대상이다. 행복기금 관계자는 “채무 조정 협약을 맺지 않은 대부업체의 채무는 채무자가 원할 경우 행복기금 차원에서 직접 대부업체와 협상해 채무를 조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행복기금으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근본적인 신용불량자 대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상시적인 서민금융 안전망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국내 서민금융은 연체가 되고 나서야 조정을 해주는 시스템 위주여서 취약계층을 돕는데 한계가 있다”며 “연체가 되기 전에 은행의 사전채무조정 등을 통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장기적으로는 독일·일본처럼 저축은행이나 상호금융이 서민층에 저금리 대출을 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서민금융 체계를 개편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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