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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와 1968 프랑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파리」의 석조건물엔 긴 역사가 응결되어있다.
「마로니에」가 도열한 대노를 가노라면 저 만큼서 상기도「나폴테옹」의 대호령,「마리·앙톼네트」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들리고「쿵코르드」광장 언저리에선 광장서 처항 된「루이」16세,「로베스피에르」같은 혁명의 희생자들의 절규가 귓전에 닿는 것 같다.
지난 5월에는 학생과 노동자들의「데모」가 이 약사의 거리를 휩쓸었다.
6월에는 총선거의 열풍이 뒤다랐다.
혁명의「에너지」를 간직한 채「파리」는 역사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균형 잃은 내치·외교>
금년 따라 7월14일의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찾는 것도 아직 식지 않은「5월 혁명」의 열기 때문이다.
이날은 1789년7월14일「프랑스」대혁명의 군중들이 절대왕조의 권위와 악정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파괴하여 시민혁명의 막을 올린 것을 기념하는「바스티유의 날」이다.
「드골」대통령은 2성장군의 군복 차림으로 재선문앞「샹젤리제」대노에서「바스티유의 날」기념행진을 사열했다.
행진을 앞장선 악대가 연주한 국가「라·마르세예즈」는 1790년 7월 14일 「파리」「바스티유의 날」기념제에 참가한「마르세유」시의 용군병사들이 항군 중에 부른「라인군의 노래」다.
「라·마르세예즈」를 들으면서 행진을 지켜보는「드골」의 흉중에선 1789년과 1968년이 하나의 시점으로 압축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교육제도를 개혁하여 학생들에게 대학행정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학생들의 요구와『우리를 기업경영에 참가 시키라』는 노동자들의 요구 앞에「드골」의 제5공화국은 붕괴의 위기를 맞았었다.
대서양에서「우랄」까지의 통일된「유럽」이라는 장대한 구상을 가지고「프랑스」의 지난날의 노광을 되찾으려는「드골」의 외교적인「그랑되르」(위대)는 사회·경제적인 정책의 실패로 인한 내정의「미제르」(비참)을 구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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