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향기와 멋은 결핍 속에서 싹 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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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5’ 향수병에 상품 표시 대신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초상이 들어가 있다. 라트비아 태생 미국인 사진가 필리프 할스만의 1954년 작품(35X27.9㎝)으로, 제목은 ‘달리의 에센스’다.

아버지의 방랑벽, 30대 어머니의 병사(病死), 첫사랑의 사고사. 20세기를 풍미한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의 젊은 시기 삶은 부재와 결핍으로 점철됐다. 그런 샤넬은 향수에서 위로를 찾았다.

‘샤넬’이란 이름이 오늘날 세계인이 다 아는 유명 상표가 되도록 한 향수 ‘N°5’(넘버 파이브)를 통해서다. 지난 5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시립현대미술관 ‘팔레드도쿄’에서 ‘Numero cinq(뉘메로 생크) 문화 샤넬전’이 막을 열었다.

Numero cinq는 ‘N°5’(Number five)의 프랑스어. 다소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현대미술 전시지만 대중적 소재인 향수 ‘N°5’라는 매개체 덕분에 쉽고 재밌게 읽히는 전시다. 다음 달 5일 폐막하는 이 전시를 전시기획자 장루이 프로망과 함께 둘러봤다.

샤넬의 아버지는 프랑스 시골 장터를 누비며 물건을 팔았다. 사실 물건을 판다기보다는 한 곳에 머무는 게 싫었던 젊은 아버지는 방랑자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겉도는 아버지를 샤넬은 늘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부재.

샤넬의 어머니는 30대에 병으로 죽었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이 부담스러웠던 아버지는 또 한 번 샤넬을 버렸다. 샤넬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부모와 가정의 부재. 고아원으로 가기 전 샤넬이 살던 고향 마을 프랑스 브리브는 다채로운 자연, 풍성한 색감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반면 오바진에 있던 수녀원은 온통 검정과 하양으로만 이뤄진, 숨막힐 듯 엄숙한 곳이었다. 색의 결핍.

샤넬의 재능 알아준 첫 사랑

1937년 미국 패션잡지 `하퍼스바자` 11월호에 실린 `샤넬 N°5` 향수 광고.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직접 모델로 나섰다. 사진 Ministere de la Culture, Mediatheque du Patrimoine, Dist. RMN, France/ Francois Kollar

샤넬의 일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아서 카펠이다. 샤넬을 지지하고 사랑해준 이 남자는 샤넬을 두고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곤 자동차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랑의 결핍.

향수 ‘샤넬 N°5’는 1919년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샤넬의 개인 향수로 만든 것이 시초다. 샤넬의 첫사랑 아서 카펠은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 준 인물. 그가 죽은 뒤 샤넬은 큰 충격에 빠져 칩거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1919년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는 샤넬을 위로할 목적으로 향수를 개발했다. ‘N°5’였다. 지금은 유명한 이름이지만 애초엔 별다른 뜻이 없었다. 보가 만든 새로운 향 10가지 중에서 다섯 번째를 샤넬이 택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결핍으로 점철된 샤넬을 위로하던 향수는 개발 2년 뒤에야 대중에 공개됐다. 미국에서 팔리기 시작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샤넬이란 이름을 알리는 데 발판이 된 대표 상품이다.

이렇듯 유명한 상품을 소재로 기획된 전시지만 ‘뉘메로 생크 문화 샤넬전’의 전시기획자 장루이 프로망은 “상업적인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향수 ‘뉘메로 생크’(N°5)를 축으로 샤넬의 일생과 그의 결핍, 결핍이 치유되며 나타난 창조성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브랜드 ‘샤넬’을 설립한 패션 디자이너 샤넬은 몇 줄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프로망은 “90년 남짓한 그의 일생은 여성으로서의 혁명, 혁명적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한 발전이었다”고 했다. “뉘메로 생크(N°5)가 샤넬의 창조성이 집약된 오브제”라는 뜻에서였다.

메디치 왕비는 샤넬의 롤 모델

두꺼운 흰색 도화지로 만든 향수 ‘샤넬 N°5’의 첫 번째 포장 상자. 1921년 만들어졌다.

“영어로 ‘넘버 파이브’라고 읽으면 상품이 되지만, 샤넬이 불렀던 대로 ‘뉘메로 생크’라고 읽어야만 이번 전시 같은 문화의 객체가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샤넬이란 한 인간에게 향수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느끼기 위해선 그가 불렀던 그대로 읽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대로 전시는 오로지 ‘결핍된 여성, 가브리엘 샤넬’을 위해 태어난 향수 N°5가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춰 가는지 밝히는 데 집중하며 샤넬의 일생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브랜드 샤넬을 상징하는 로고의 탄생 과정, 향수와 샤넬의 연관성 찾기 같은 것이다.

카펠은 샤넬에게 수학이나 과학, 역사, 지리학 등 다방면의 책을 권했다. 카펠 생전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샤넬은 그의 죽음, 즉 카펠의 결핍을 그가 남긴 책을 읽는 것으로 채워 나갔다. 샤넬은 그 책 중에서 카트린 메디치 왕비의 이야기, 특히 혁명적 여성성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메디치 왕비는 16세기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 왕 앙리2세와 결혼하며 향수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한 인물이다. 앙리2세 사후엔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하기도 했다. 여성은 흰 상복을 입는 당시의 관례를 깨고 남자들의 상복 색깔인 검정을 택해 여성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프로망은 두 여인과 향수 N°5의 연결 고리를 이렇게 설명해 냈다. “샤넬이란 디자이너가 기존의 우아한 여성복이 아닌 남성들이나 입을 법한 재킷·바지 같이 ‘여성을 위한 편한 옷’을 만든 것도, 그저 머릿속 구상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메디치 왕비의 혁명적 사고를 동경했기에 가능했다.” 이뿐 아니다.

전시품을 품은 진열대는 N°5 향수병과 닮은 모양새였다. 두꺼운 아크릴로 된 투명한 진열대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했다. 그 속에 샤넬이 읽었던 메디치에 관한 책, 16세기에 사용됐던 은제 향낭, 메디치 가문의 C자 로고 등이 놓여 있었다. 관객은 그 앞에 서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전시 설명을 통해 N°5의 기원과 샤넬의 인생을 이해하도록 돼 있었다.

피카소·달리·콕토 … 거장들과 교류

프랑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팔레드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뉘메로 생크 문화 샤넬전’의 전시장 모습. 작품 진열대가 투명한 아크릴로 돼 있어 향수 ‘샤넬 N°5’의 유리병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향수 N°5는 자연스럽게 결핍의 치유를 상징하는 매개체에서 샤넬의 창조성이 응축된 대상으로 변모해 나갔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문호 장 콕토, 20세기 초 혁명적 예술 운동인 ‘다다이즘’ 작가들 모두 샤넬과 직접 교류했다. 샤넬은 결핍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듯 당대의 예술가들과 적극 만났고 이들의 예술 활동을 후원했다. 그런 샤넬이 “순수 예술에서 받은 자극을 향수 N°5에 투영해냈다”는 게 프로망의 설명이었다. 피카소의 입체 효과는 향수 N°5의 초기 상자곽 디자인으로 이어졌다. 다다이즘 작가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며 사용한 인쇄 글씨체는 샤넬이란 브랜드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고유의 로고 글씨체와 놀랍도록 유사했다. 현재 대중이 즐기는 샤넬에 관한 모든 게, 가브리엘 샤넬의 결핍·치유·교류를 통해 완성됐다는 큰 줄기가 완성되도록 꾸며진 전시였다.

‘뉘메로 생크 문화 샤넬전’은 현대미술 작품 하나하나를 모아 놓은 전시가 아니었다.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현대 미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두꺼운 투명 아크릴판으로 된 수십 개의 작품 진열대는 좌우, 중앙 세 줄에 걸쳐져 놓여 있었다. 좌우 양쪽의 진열대에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유물, 샤넬의 유품과 그를 뒷받침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로랑 비르지세와 제롬 슈로모프의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3층 전시장에 이르는 팔레드도쿄 입구는 정원예술가 피에트 울로프의 정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전시기획자 프로망은 “자연·향기가 직관적으로 전시의 주제인 향수 N°5를 떠오르게 하는 장치”라면서 “이곳을 통해 관객이 N°5의 추상적 공간으로 접어들도록 했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파리=강승민 기자
사진=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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