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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난했던 영광의 한돌|6대 박정희대통령의 시정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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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박정희대통령은 지난해 7월1일 취임 연설에서 『앞으로 4년간이 대망의 70년대를 향한 중대한 시기임을 깊이 명심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박대통령의 1년은 경제건설과 병행하여 국방태세를 재정비하는 과제에 시정이 집중되었다.
그는 연두사에서 68년을 건설의 해로 설정했으나 「l·21무장공비의 서울침입사건」으로 국방의 강화를 경제전설과 병행해야한다는 과제를 안았다. 박대통령은 2월29일 예비군무장계획을 발표, 일단 예비군설치법을 근거로 예비군편성을 서두르면서 법을 보완하고 지난4월1일에는 백만예비군을 창설 발족시켰다.
그의 외교노력도 국방의 강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에 집중되었다.
그는 취임식직후 취임식에 참석한 미·일·중 등 우방수뇌들과 4개국 고위회담을 열어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했고 지난 5월에는 「셀라시에」「이디오피아」 황제를 맞는 등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가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외교활동은 월남문제와 우리의 안보문제를 협의한 일련의 한·미 교섭이다. 「1·21」 무장공비 침입사건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이 일어나자 자칫 「푸」호 사건에만 쏠리려는 국내외의 관심을 무장공비사건 쪽으로 되돌리면서 한국의 자주방위강화를 누구보다도 역설했다.
지난 2월의 미대통령특사 「밴스」씨의 내한을 통한 교섭을 거쳐 4월18일 「호놀룰루」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호놀룰루」회담은 월남의 평화회담 (파리회담)에 대한 참전국의 의견소통도 중요 의제였지만 이와 함께 한국의 국방력강화를 위한 미 측의 지원문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박·존슨」회담에 이어 지난5월의 한·미 국방각료회담이 마련되었으며 미국은 향군무장의 가능한 뒷받침을 포함한 대한군사지원을 약속,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지난6월13일 공군최대의 「레이다」기지가 완공되고 한수이남에 포진되었던 방위선이 한수이북으로 옮겨지고 소극적인 기동방어전술이 적극적인 「거점고수방어전술」로 발전되었다.
국방의 강화는 무거운 부담을 안겨놓기는 했지만 아직은 경제건설에 차질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박대통령이 특히 강조했던 고속도로, 석유화학, 종합제철 등 사업은 모두 예정대로 착수되었다.
67년10월 종합제철공업단지를 기공하고 미·영·불·이 등 5개국과 종합제철기본계약도 체결했다.
68년3월에는 석유화학공업단지가 기공되었으며 2월1일에는 경부고속도로건설의 첫 사업으로 경수간 고속도로의 기공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일면은 반드시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동백림간첩사건으로 인한 대 서독관계의 일시적 미묘화, 재일교포북송연장과 동경도의 「조선대학교」 인가 등의 외교 면의 난점이었다. 내정 면에서도 시련은 없지 않았다.
6·8후유파동으로 정부가 정상화되지 못한 가운데 취임식을 가진 그는 취임 직후 국회의장에게 국회정상화를 촉구하는 공한을 보냈고 대법원장에게도 선거후유파동을 가라앉히기 위한 지원으로 선거소송처리를 서둘러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지난해11월 여·야 대표자회담을 성립시키고 여·야 합의의정서를 통한 국회정상화를 실현했다.
그러나 그 의정서실천작업은 여·야의 충돌을 낳았을 뿐 결실을 보지 못하고있다.
박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공화당도 지난5월 김종비 당의장의 정계후퇴로 한고비 시련을 겪었다.
집권세력내부의 이 돌연한 사태는 일부당원의 동요를 유발시켰으나 박대통령의 신속하고 과단성 있는 조치로 불과 1주일만에 큰 파동 없이 일단 수습되었다.
이 사태가 박대통령에게는 예기치 않은 정치적 시련이었던 것이 분명하며 일부에서는 그의 영도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태가 당장 이상 더 확대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히려 박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70년대를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이영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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