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북한 우상화 용어 우리식 손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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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 총정치국장 최용해 등 김정은 특사 일행 22일 베이징 도착’.

 지난주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동향을 담은 국정원 관련 자료에는 ‘적군(敵軍)’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조선인민군’을 이렇게 바꿔 쓴 것이다. 국정원은 또 문건에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을 의미하는 ‘태양절’을 ‘김일성 출생일’로, 북한의 국립묘지 격인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대성산 공동묘지’로 바꿔 표현했다. 북한식대로 따라 쓰던 고유명사 표기법도 바꿨다.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는 ‘이설주’로 썼다.

 모두 남재준 국정원장 체제에서 시작된 변화다. 국정원 관계자는 27일 “북한의 우상화·선전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쓰는 건 문제라는 판단에서 손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경찰 공안파트와 군 정보사·기무사 대북부서가 동참했고, 통일부 등 정부 부처로 확산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런 배경엔 김정은 체제 들어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선전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국정원의 판단이 깔려 있다.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이던 금수산의사당을 사후에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칭했는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지난해 이를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다시 바꾼 게 한 예다. 북한 당국과 관영매체들이 우리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비방을 퍼붓고 김정은이 직접 나서 우리 국민에게 ‘핵찜질’ 등의 위협을 가한 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식 표현과 용어를 둘러싼 신경전은 1990년대 초에도 있었다. 당시 북한이 ‘비전향 장기수’를 활용한 대남 비난 공세를 펼치자 정부는 이들을 ‘출소공산주의자’란 용어로 고쳐 부르며 맞섰다. 노무현 정부 때는 통일부가 탈북자 급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북한을 의식해 이들을 ‘새터민’으로 개칭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은 “김일성을 우상화 차원에서 태양처럼 떠받들자고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태양절 등의 표현을 우리 내부적으로 바로잡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바꿔서 사용하고 있는 일부 거친 표현들은 남북 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을 공연히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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