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축회담' 카드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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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6자회담의 환경이 미묘해졌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31일 담화가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담화가 '회담 참여의 문은 열었지만 새 조건으로 상황을 까다롭게 만들었다'며 대응에 고민 중이다.

◆ 문제는 군축회담=정부 일각에선 '군축회담' 카드는 판을 깨려는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군축회담은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공식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은 용납하지 않는다. '받지 못할 공'을 던진 것은 회담에 뜻이 없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6자회담 초점은 북한의 핵 시설을 폐기하고 핵무기 제조 능력을 없애는 데 집중돼 있었다. 해법도 대북 에너지 지원으로 모아졌다. 1994년 제네바 합의도 경수로 제공 카드로 돌파구를 마련했고, 지난해 3차 6자회담 때도 미국은 한국.중국 등의 대북 에너지 지원 카드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핵 보유국'인 북한과 군축회담을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 핵을 폐기하려면 먼저 한반도의 미국 핵부터 철수하라"는 북측의 주장이 가능해진다. 공격 대상이 북핵에서 주한미군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 남한에는 미국의 '핵 우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 당국자는 "1991년 미국의 모든 전술핵이 철수한 상태"라고 밝혔다. 담화가 괌.오키나와 등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국 핵무기 폐기까지 언급한 것은 이 지역의 모든 미 전술핵을 걸고 넘어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정부 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 긍정적 계기 될 수도=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그러나 "군축회담 요구가 반드시 부정적이진 않다"고 지적했다. 전술핵이 한국에 없으므로 북한이 회담장에 나와서 주장해도 아무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담화는 또 '상호 검증'을 요구한다. 이는 북한에 대한 검증도 동시에 포함한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상호 검증을 통해 북한의 군사기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오히려 반길 일"이라며 "미국과 얘기해 봐야 하겠지만 미군 부대를 보여주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 6자회담 전망은=회담 전망에 대해 정부는 신중한 입장이다. 한 당국자는 "2.10 북한 외무성 성명 이후 사실상 예상됐던 수순"이라고 했다. "버티겠다는 뜻인 만큼 과민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한 당국자는 "담화가 나온 시점과 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이종석 국가안보회의(NSC) 사무차장의 중국 방문 과정에서 '무마성 발언'이 전달되면서 요구가 의미를 잃게 됐는데 바로 그 시점에 담화가 나왔다는 것이다.

담화가 "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고 회담에 대해 적극적 주문을 한 점도 지적됐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판을 깨려는 것이 아니라 명분을 찾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중국이 큰 변수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다. 중국은 6자회담이 군축회담으로 성격이 바뀌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이 북측의 제의를 무시할 경우 군축회담 논란은 당분간 수면 아래로 잠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안성규.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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