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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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삼척군 장성읍내의 어느 병원 수술실에서 난데없이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이 사고로 원장이 다치고 그의 부인은 실명까지 했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범인은 뜻밖에도 10대의 소년이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가 생명을 잃은 것에 분풀이를 하려고 그것을 했다. 수술 집도는 원장이 없는 사이에 조수가 대신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소년의 치기 넘친 증오심에 부채질을 하는 것은 지나친 감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판사들에게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의사의「모럴리티」는 어느 직업보다도 초월하는 지상 명령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조수가 수술 집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병원이 지니고 있는 평상시의 분위기를 설명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의사인 원장이 부재할 땐, 수술까지도 조수가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진단이나 투약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꼭 장성읍내의 이 병원 경우만은 아닌 것이다. 「인턴」급이 환자를 모르모트 다루듯 하는 예는 서울의 종합병원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한다. 일본에서 깊은 존경을 받던 내과 명의 중중웅씨는 정년 퇴직을 하는 자리에서 그의 평생의 오진율은 14%였다는 발표를 했었다. 세상은 그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상인들은 『천하의 명의가 그럴 수 있느냐?』는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의사들은『역시 명의는 다르구나!』하는 탄복을 했다는 것이다.
현대엔 명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의사의 대부분을 기계가 대신하며, 그 경과에 따라 도식적으로 투약이 되기 때문이다. 의학 기계의 발달, 약의 개발은 사실은 명의의 존재를 부인할지 모른다.
오늘의 의사들은 환자의 내면에 집착하기보다는 공식적인 질문과 사무적인 처리에 의존하는 진찰들을 하고 있는 느낌을 우리는 자주 받고 있다.
차라리 왕년의 그 심각하고 진지하며 신중한 노의사에게 존경심이 기운다. 그런 성의는 고사하고 그런 시늉조차 찾기 힘든 세상이다.
의사가 감히 조수에게 집도를 허락하는 것은 그런「모럴리티」의 붕괴에서 생긴 만용은 아닐까. 실로 명의가 아쉬운 역설적인 의학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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