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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군은 패주 했다.|「케산」포위망 풀리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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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주 연합군 순찰대가 전투로 거의 초토화한 「케산」지역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이 수색에서 비록 적의저항은 없었지만 연합군은 월맹군의 참호와「벙커」, 그리고 수 톤의 무기와 1천3백여구의 시체를 찾아냈다.「케산」에 주둔하고있는 6천명의 미 해병을 악착같이 둘러 싸고있던 월맹군은 이제 도망갔거나 죽었거나해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월맹군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은 너무나도 정확해서 월맹군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사실「케산」전투는 전투 중 공군력의 사용이 얼마마한 효과를 줄 수 있는가를 증명해준 결과가 되었다.
「지압」은 그 당시「프랑스」군에 감행했듯이「케산」주변에 수만명의 월맹정예부대와 방대한 양의 화력을 집중시켰었다.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난 미국은「케산」방위의 유일한 길은 막강한 공군력을 동원하는 길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상공엔 특수사령부>
「월리엄·W·모미어」장군은「사이공」교의 「탄손누트」공항에 특수사령부를 설치했는데 이 사령부의 임무는「케산」주위의 공중작전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가장 뛰어난 전략가인「크레이턴·에이브럼」장군과「윌리엄·B·로슨」준장은「지압」이 병력과 군수품을 집중시키고있을 법한 지역을 발견해내고 그 지역을 미군기들의 제1의 공격목표로 선정했다.
수십대의 정찰기가「케산」주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비행했다. 정찰기 밑에 달린 고성능「카메라」는 밑에 있는 공산군이 성냥불만 켜도 이를 알아낼 정도였다.
이 모든 작전을 조종하기 위해 ABCCC라고 불리는 공중사령부 겸「컨트롤·센터」가「케산」지역 높은 공중 위에 항상 설치돼있었다.
그건 바로 C-130「허키·버드」기였는데 이 안에 최신식 전자기계가 설치돼있어 비행기에 타고있는 공군대령이 지상에 있는 해병과의 연락, 그리고 「사이공」과의 모든 연락들을 물샐틈없이 취했다.

<최신정찰장비 동원>
처음에는「케산」의 메마른 지형은 B=52중폭격기의「레이더」장치를 이용하는데는 여러 가지 문젯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B=52의「레이더」장치는 교량이라든가 고층「빌딩」과 같은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지상표적을 주로 포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은「스카이·스포트」라고 불리는 최근에 개발된 장치를 동원하였다. 「스카이·스포트」는 월남해안에 있는 한동력 지상통제「센턴」를 사용하여B=52폭격기를 공격목표지역으로 유도했다.
미군은 전투지역에서 수마일 떨어진 여러 개의 언덕에 무수한 신호를 발신하는「레이더」반사경과 전자신호등의 역할을 하는 전선 망을 설치했다.

<미기지 주변까지도>
B=52기들은 이러한 장치에서 목표물까지의 거리를 측정함으로써 신기할 만큼의 정확도로 폭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사실B=52 중폭기들은 미 해병기지 주변에서 1백 야드밖에 안 떨어진 지점까지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미 해병기지 주변의 5평방 마일의 주변에 총10만3천5백톤의 폭탄이 10주일동안 떨어졌다.
폭격은 월맹군에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전폭기를 두려워했으나 무엇보다 B∥52중폭기에는 사지를 벌벌 떨었다. 왜냐하면 B=52중폭기는 4만 피트 이상의 고공을 비행하므로 거대한 폭탄이 발 밑에 떨어지기까지는 땅위에 있는 그들은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 측 추산에 의하면 미국의 폭격으로 1만5천명의 적군이 죽거나 부상했다한다.

<구릉이 평지 되도록>
폭탄으로 참호는 파괴되고 언덕은 평평하게 되었으며 땅덩어리는 말라비틀어지게 됐다. 그뿐인가, 폭탄은 월맹군의 사령부가 있는 참호까지도 깡그리 없앴으며 이 바람에 그 안에 있던 군인은 몰살했다.
B=52기의 폭격으로「케산」의 인접지역에는 5천 건의 2차 적인 연쇄폭발이 잇달았으며 2천 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는 적의 탄약과 휘발유 비밀저장소가 막심한 타격을 받았음을 시사해준다. 미 공군은 이 폭격으로「보·구엔·지압」월맹국방상의 관리하에 있는 3천5백 톤에 달하는 보급물자가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물자는 일개전투사단이 한 달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수량과 맞먹는다.

<견디다못해 후퇴령>
「디엔비엔푸」승리의 14주년 기념일 전날인 3월12일쯤 「지압」은 제2의「디엔비엔푸」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케산」에의 교체병력 파견을 중지했다. 그리고는 3월22일 그는「케산」근처의 지리멸렬된 2개 사단의 철수령을 내렸다. 바로 그날 「케산」지방의 계절풍은 멎기 시작했고, 좋은 날씨에 힘입은 미군전폭기들은 지축을 흔드는 듯한 B=52기들의 폭격에 합세, 적을 강타했다.
미군기의 폭격이 가중되자 남아있던 월맹군은 철수하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월맹정규군포로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의 폭격은 공산군의 보급로를 무너뜨렸기 때문에「지압」의 병사들은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포로들은 하루에 반 파운드도 안 되는 쌀로 몇 주간을 지탱해왔다고 말했다. 그들이 포로가 되기 직전 3일간은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고 이들 포로는 말했다. 당장 죽을 위험에서 벗어난 이 포로들은 미군의 폭격과 폭격에 월맹군의 한 연대는 총 병력의 75%인 2천명이 상실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숱한 군수품 버리고>
전쟁터에서의 여러 물적 증거는 미군의 승리가 어떠했는지를 더욱 설득력 있게 증언해 주었다. 월맹군은 군수품을 대단히 아끼기 때문에 보통 경우엔 소총탄환 한발이라도 버리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번엔 철수에 워낙 급했던지, 산더미 같은 값진 자재를 남겨두고 철수했다.「케산」지구를 대충 수색해본 결과로도 미군은 1백82문의「로키트」와 박격포, 26만발의 소총탄약, 1만3천발의 큰 구경의 총포탄약, 8천7백발의 수류탄과 지뢰를 노획했다. 수백명의 월맹군은 후퇴하는 경우에도 보병들은 각자의 무기만은 잃지 않는다는 전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AK47소총을 버리고 갔다. 이리하여 자발적인 전쟁축소의사의 표시로서 월맹군이 철수했다는 생각은 이와 같은 전쟁터에서의 엄연한 사실과 모순 되 는 것이었다.「케산」전투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월맹군이 미군의 공군력에 의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타임지4월19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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