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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중국'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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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국제사회가 무심코 지나쳐서 그렇지 최근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중국 외교의 근간을 흔드는 묘수를 두었다. 필리핀 해안경비대의 총격으로 인한 대만 어민 사망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 9일 사건 발생 이후 대만은 아직까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필리핀의 사과와 배상,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대만의 반발이 워낙 거센지라 현재 필리핀은 사과하고 사건 조사도 하겠다며 한발 물러서 있다.

 한데 아키노 대통령은 사과하는 과정에서 중국 외교의 뿌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는 우선 타이베이(臺北) 주재 필리핀 대표부를 통해 사과를 했다. 양측은 공식 외교 관계가 없어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를 통해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대만이 정부 차원의 사과를 요구하며 더 거센 반응을 보이자 이번에는 대통령 대변인을 통해 사과를 하면서 대만인과 피해자 가족을 거론했을 뿐 ‘대만 정부’는 쏙 뺐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중시하겠다는 토도 달았다. 중국과 수교한 모든 나라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중국을 인정한 만큼 필리핀의 사과 대상은 대만이 아닌 중국 정부라는 얘기다. 중국의 일부이기를 거부하는 대만이 다시 펄펄 뛰며 11개 항의 대필리핀 제재 조치를 취해도 아키노는 요지부동이다.

 중국의 반응은 좀 황당하다. 원칙대로라면 아키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대만 정부를 대신해 필리핀 정부와 사건 수습을 위한 협상을 주도해야 했다. 한데 외교부는 필리핀의 만행을 규탄하며 대만의 모든 조치를 지지하는 취지의 논평을 내놨다. 언론은 언론대로 “대만과 힘을 합해 오만한 필리핀을 그냥 두면 안 된다”며 연일 필리핀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군까지 나서 함정을 남중국해로 보내 필리핀에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외교권이 없는 지방정부가 중앙정부를 제쳐놓고 제3국과 외교적 교섭을 하고 있는데 박수 치는 모양새다. 참고로 중국은 자국 행정구역편제에 대만을 23번째 성(省)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물론 중국은 나름대로 고민이 있을 것이다. 당장 필리핀과 교섭에 나설 경우 대만의 반발은 물론이고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2000~2008년)이 주도했던 ‘대만독립론’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대만과 관계가 악화되면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을 도와주고 일본의 대만 진출까지 걱정해야 하는 국가 안보적 고려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대만의 외교 교섭을 묵인하자니 각국과 수교 당시 합의했던 ‘하나의 중국’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 외교의 신뢰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최근 중국의 한 외교당국자가 사석에서 이렇게 고충을 털어놨다고 한다. “현실을 고려하자니 외교근간이 흔들리고, 원칙을 지키자니 후폭풍이 걱정이고….”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