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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의 종교(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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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문장」지는 1939년 2월에 창간되어 1941년4월에 페간된 순문예지. 동지의 추천제에 의해 등장한 신인은 여섯사람이었다.
자료를 정리할겸 그들의 추천과정을 살펴보면-.
39년 2,3월호에 추천작품 모집 광고가 나가고 4월초에 조지훈의「고풍의상」 ,김종한의 「귀로」가 첫작품으로 실렸다. 5윌호에는 이한직의 「풍장」 「북극권」이, 6월호에는 김종한이「고원의시」 「그늘」로, 이한직이 「패여초」로 각각제2회 추천을 거쳤고, 박두진이 「향현」 「묘지령」 을 들고 나왔다.
8월호에서 이한직은 「온실」 「낙태」로, 김종한은「할아버지」 「계도」로 3회추천을 완료. 9월호에 박두진은 「낙엽송」으로 제2회 박목월은 첫작품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가 통과되었다. 9월호에는 박남수의 「심야」 「마을」 에 이어 10월호에 「주막」 「조롱불」이, 11월호에선 조지훈이 「승무」 로, 박목월이 「산그늘」로 각각 2회.
4O년1월호에서 박두진은「의」 「들국화」 로, 박남수는 「밤길」「거리」 로 각각3회를 마쳤다. 2월호에서 조지훈은 「봉황추」 로, 박목월은 9월호에서 「가을 어스름」외1편으로 관문을 뚫었다.
암담한 계절이었다. 『전쟁은 샅구꽃처럼 만발』 (김종한의 시) 하고 있었다.
39년9월에 영·불의대독선전포고로 재2차대전발발. 40년6월 이태리의대영·불선전포고. 41년6월 독·소간전12월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독일도 대미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격동하는 국제정세는 국내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강제징병제도에, 국민징용법에, 창시개명 강요에, 문학계엔 군국주의적 국책협력을 위한 어용문학단체가 결성되었다.
이토록 살벌한 시대에「데뷔」 한 신인들은 처음부터 시를 종교처럼 간직한 수인들이었다. 세상이 그대로 하나의 감옥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 이란 사면을 가로막은 두터운 절망의 벽을 의미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현실에 저항할 길도 탈출할 길도없는 부자유속에 얽매여 있었다.
청록파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시인들이 자연을가까이 사귀면서 노래했다는 공통점도 따지고보면 우연한 일치는 아닐것이다.
『자연은 청록파의 마지막구원을 희구한 신이었다』고 하는 말처럼 암담한현실을 비관하고 탄식하고만 있을수 없었던 그들은 자연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면 크게본 이와같은 공통점을 제외한 이 시인들의 작품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초기작들을 중심으로-.
조지훈(본명 동초· 1920∼) 의 추천작 「고풍의상」 「승무」 「봉황추」 를 비롯한 시편들은 잊혀져가는 고유한 전통과 풍습에대한 아쉬움을 노래한 작품들이었다. 추천사에서 선자는『조군의 회고적 에스프리는 애초에 명소 고빈에서 날조한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유한 푸른하늘 바탕이나 고만한 자기살결에 무시로 거래하는 일말운하와같이 자연과 인공의 극치일까합니다』 라고 했다. 그는 형식과 기교를 또한 중시한 시인이었다.
박두진 (1916∼)은 보다 자연과 친밀한 교감으로 작품을썼다. 추천작 「낙엽송」「들국화」 「향현」 「묘지령」등을 통해서도 알수 있지만 선자의 평에도 『박군의 시적 실체는 무슨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입니다』 하고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을 소개하여 선자는 법탈이상이다』 라고 했다. 그자연을 접하는 시정신은 하나의 경건한 종교와도 같은것이었다.
박목월 (본명 영종1917∼) 은 시로 추천을 거치기전에 동시를 썼었다. 「문장」에 투고 할때 처음목월이란 필명을 썼다. 신문광고에 나온 자기필명에 익숙치 않아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추천작들에 대해 선자는 소월과 비겨 그 민요적 율조의 특색을 지적하고 격찬했다. 영남 (경주를중심으르) 의 지방적색조에 젊은 날의 풀길없는 고뇌를 민요의 정형율적 격조로 노래한것이 나의 초기작들」 이라고 그는말한다.
박남수(1918∼)의 추천작을 포함하는 시집 「초롱불」 (1940)에 담긴 초기작들은 일상적인 생활주변이나 시골 풍경에서「테마」를 얻어 「리얼」 하고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는것이 특색이다.
전기한 청록파 시인들과 다른점은 출발때부터 줄곧현실과 유리되지않고 자연이나, 고독이나 추상보다 일상적인데 착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8·15해방을 이북에서 맞아 50년 12월에 월남하기까지 오랜 공백기간을 가진것을 몹시 아쉬워하는 그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하고있다.
이한직(1921∼)은 「문장」 지 출신중 최연소자인 조숙한 시인이었다. 윤택한정감과 무구한 상상으로 구김살없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모더니즘」 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래의「모더니스트」들의 통폐였던 개성의 상실이나 경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김종한 (1916∼1944) 은 시의 순수성을 주장하여 시평으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솔직하고 명쾌하고 단순』 하여 독특한 「스타일」 을 가지고 『비애를 기지로 포장하는 기술』 도 좋다는 추천평을 받았다. 앞날이 촉망되는 신인이었으나 44년 29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문장」지는 일어사용을 강요하는 일제의 발악에 못이겨 41년 자진 폐간.
말과 글을 잃은 누리엔 짙은 어둠만이 깔려있었다.(이 기사를 도운분 조지훈·박목월· 박남수제씨)

<인태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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