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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부동산」소유권시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즘 2백여년전의 공문서(이조당시)를 근거로 정부를 상대로한 부동산소유권소송이 제기되어 판결결과가주목되고 있다. 땅을 사들여 등기를 마친지 1년도 못되어 관계공·사문서가 위조되어 하루아침에 남의땅이되고마는 요즘 실정에서 보면 수백년전의 문서하나만으로 소유권을 찾을수있느냐 하는점에 더욱관심을 갖게한다.

<진해·무주두곳서>
수백년전의 문서를근거로 소유권을 주장하고있는 대표적인소송「케이스」를보면 진해에있는 임야45만여평과 무주구천동주변의 땅9천9백여정도를들수있다.
두가지소송이 모두 이조23, 24대 순종과 헌종이 국가에 공을세운사람에게 넓은땅을하사, 이를 상속해온 후손들이 국왕의 하사문서를근거로 소유권을들고 나선것이다.
헌종이 하사했다는 45만여평에달하는 진해시안곡동15, 37, 61번지일대의임야는 서울민사지법의판결로 원고측의소유로판가름이났으나 국가측에서 항소,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어야 완전한 소유권을 얻게된다.
그러나 이소송에서 원고측이 승소판결을받게된 결정적인 원인은 부동산취득시효규정이 적용된것이지 땅을 하사한다는 관계문서가 진본으로 밝혀진 때문이 아니었다.

<민법따라1심승소>
원고측에서 문제의땅을 20년이상 소유의 의사를 가지고 평온,공연하게 점유해 왔다는 사실이 인정됐기 때문에 민법 245조(부동산취득시효규정)에 따라 소유권을 되찾게 된것이다.
재판부는 팽씨문중에서 증거로제출한 어명하사문(충동부성급문)의 진본여부를 감정한결과사학자들에의해 진본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원고측의 취득시효을 인정할 수 있는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았다.
이소송을 심리했던 김영준부장판사는『원고측의 취득시효가 인정된이상 국왕이 하사했다는 관계문서의 진본여부가 판결에 영향을 주지않았다』고 밝혔다.
민사소송사상 소송물의가치를 따지기 힘들만큼 넓은 땅덩어리인 무주구천동사건은 쉽게 판결이 내려질 수 없는 복잡한 요인을 갖고있다.

<3년 끈 무주사건>
지난65년에 제기된 이소송은 담당재판부가 바뀌는등 3년이 넘도록 결심도되지않아 판결이내려지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릴것으로 보인다.
『네눈 닿는 곳은 모두 네땅이다』라는 순종의 어명에따라 당시 무주부사는 국가에공을 세운 이호참판에게 향제봉을 기점으로 오른쪽에는 칠봉괘방, 왼편에는 거음치, 조령, 주마에이르는 땅을 주었다는것.
이참판의 3대조가된다는 원고 이병락씨는 2대조인 시용씨, 아버지 택구씨를 거쳐 이땅을상속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1918년 조선임야조사령이공포시행될 때 소유자로서 신고를 하지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국가소유로 등기되어있다.
원고 이병락씨는 아버지 택구씨가 항일투쟁으로 중국에 망명중 조선임야조사령이 시행 되었기 때문에 총독부의정책을 부인한 아버지가 대한민국에 이땅을 신탁, 나라의 명의로 땅의경계를 확정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이소송에 대한 승패의 판가름은 순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문서의 진본여부와 이택구씨가 국가에 신탁한 것으로 보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불씨는임야조사령>
소송기록에는 이택구씨가 문제의 땅을 국가에 신탁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항일투사로 중국에 망명했다는 사실만으로 국가와의 신탁행위를 인정할수있느냐에 문젯점이있는것이다.
이조때의 문서만을 근거로 소유권을 다루는 소송에 있어서는 조선임야조사령이 소유권을판가름하는데 절대적인 작용을한다.
조선임야조사령이 시행되어 신고자의 명의로 사정된 부동산은 신고자의 소유로 본다는 대법원의판례가 있기때문이다.
조선임야조사령에따른 사정으로 소유자가 대외적으로 확정됐다해도 신탁관계에는 영향을미치지못하므로(대법원판례) 신탁관계로 볼 수 있는냐에 대한 사실판단과 법률해석이 문제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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