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정의·공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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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썩어빠진 특권층의 탐욕의 지배욕과 고루한 인습에 얽히어 가난과 무지속에 헤매는 대중앞에 개화의 횃불을 높이들고 나섰던 우리들의 선각자 서재필박사가 순한글판의 독립신문을발간했던 1896년4월7일을 기념하는 제12회의 신문의날을 맞이하여 신문단체에서는 우리네 신문이『신뢰받는신문』이 되기를 기약하는 표어를 내걸었다. 극히 평범한 표어라고도 할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사회가 불신의 사화라고도 하는 만큼 부정·불법·부패가 특히 정계관계에 상하로 아니뻗친곳이 없다고 개탄하는 국민의 소리가 심각히 들려오는 이 때임을 생각할 때, 소위 사회의 거울이요, 목탁이요, 또 어두운 사회의 자명등 이어야 한다고 일러오는 신문이 스스로 사회의 신뢰를 받아야 하겠다고 외치고 나섰다는것은 뜻있는 일이아닐수 없다.
첫째 신문이 사회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진실」을 생명으로 하고있는 것이신문이란 점을 다시금 다짐하여야할 것이다.
진실은 거짓없는「사실」을 뜻하는 것이고, 사실은 있는 그대로 검은것은 검고 흰것은 희다고하는 명백한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에는 진실이 있을뿐 거짓이 진실의 탈을쓰고 나선다면 이는 대중을 속이고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죄악을 범하는 일이 될것이다.

<아는범위서만 보도를>
물론 진실을 밝힌다든가 사실을 사실대로「진실」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란결코 쉬운일은 아닌 것이다.
사실,대개의 문제나 사실이 시간과 더불어 발전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 사실의 완전한 보도를 기약키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사실의 진실을 캐내고자 할때의 우리의 태도, 혹은 그 자세가 어떤 것이냐에 있을 것이다. 즉 아는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것을 모른다고 하는것이 진실로 아는 일이요, 또 아는 것을 안다고 할 뿐 아니고 모르는 것 까지도 안다고, 일은 결국 아는일도 모르는일이 되고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옛어른들의 교훈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 신문과 기자들은 어떤가. 알고도 모른체한다든가, 모르고도 아는체한다든가, 심하면 있는 사실만을 있다고 할 뿐아니고 없는사실까지 있는사실로 만드는 일은 없는가. 만일 그런일이 있다면, 또는 그렇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면 그 붓 때문일까.

<권력에 아부않는 정의>
신문은 사회정의를 높이 받들고 나갈 것을 또한 생명의 하나로 하고 있다. 정의의 정신이라고 하면 진실을 사랑하고 지혜를 닦아나가는 인간의 타고난 양심과 자유의 정신을 발전시켜야하는데 있다할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정신의 사회적 역사적 발전의 길은 켸켸묵고 썩은 인습에 젖은 특권적 내지는 폭력적 낡은 지배체체를 타파할 것과 또 그러한 풍조에 따르기 쉬운 모든 부정·불법·부패를 포함한 사회개혁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발전을 전제로하고 있다. 마치 흐르는 물이 바다로 바다로 큰물줄기를 찾아 흐르는것과 같은 자연적 세력을 가지고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근대사회의 대중적 움직임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사상은 권력의 변천에따라 많은 변화를 가졌다. 때로는 권력이 곧 정의라고도 해왔다. 권력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릴바 아니라는 사상이 곧 정의의 사상이라고도하여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여 권력의 역전과 아울러 사회발전의 악순환을 저지른 때도 있었다.
오늘의 시대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나라요, 국민의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정치의 광명을 표방하는 시대인 것이다.

<국민위해 용감히 비판>
그러나 인간의 약점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괴물에 사로잡히기 쉬운터이라 좀처럼 그 약점을 탈피키 어려운 것이 인간이요, 또 사회발전의 한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정치학의 교과서같은 책에 흔히나타나는 말중에는 아무리 친하던 친구라도 권력을 잡았을때는 사람을 다시보라고도 하듯이 권력을 정의의 사상위에 쌓아올리지 못하고 권력의 바탕위에 권력을 세우고 다시 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권력의 동원만을 꾀한다면 이는 분명히 방법을 위하여 목적을 그르치는 일이 되기쉬운 것이다.
그러면 신문이 생명의 원줄기의 하나로 받들어야할 정의의 정신의 발현은 무엇을 뜻할것이냐. 이는 비판의 정신을 굳이가지되 어떤 권력에도 금력에도 주저함이 없이, 특히 귄력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를 가릴것없이 국법을 존중하는 전제에서 언제나 용감히 비판할능력과 기백을 갖추고 그 중에서도 모든 부정·불법·부패와 싸워야할 것인 것이다.

<의견발표에 간섭없게>
국민대중의 신뢰를 받기위한 신문의 생명의 또다른 하나는 공정의 정신이라고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말한바로도 진실과 정의를위한 신문의 방향이나 태도가 공정의 정신에 토대를 가져야할 것임은 더 설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의 정신은 진실과 정의의길을 위하여 가장 아껴야할 정신의 하나임을 다시 말해둘 필요가있지 않을까 한다. 공정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자유·독립의 정신을 굳게가져야 하는데 있을 것이다. 흔히 언론자유라고하면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사상의 길잡이가 되어왔음을 전제로하고 민주주의제도의 정치적·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하는 길이 곧 언론자유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있음을말한다.
따라서 언론자유, 즉 국민대중의 집중적이며 종합적인 의사표시를위한 신문의 사회적 사명은 어디까지나 자유·독립의 정신을 가지고 그 사회 그 국가의 이익과 발전를 위해서는 의견발표의 어떤간섭도, 어떤압력도 두려워 할바없고, 또 어떤 당파나 권력에만 편을드는 일이없이 언제나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성도 좋거니와 찬성에 대한 반대의견의 당당한 주장이 오히려 더 뜻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대야당으로 여야감시>
이런점에서 신문은 언제나 여당일수도 없고 야당일수도 없다. 그러나「공정」이라고하여 약자와 강자에대한 분별이 없다면 그는 편견에 빠지는 일이 되기 쉬울 것이다. 신문은 본래가 대야당의 입장을 지켜야하는 것이 일반적 전제가 될뿐아니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견제와 균형을 잃어서 안된다는 점에서도 신문의 입장은 그러하여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문은 단순히 여당에대한 야당이 아니고, 야당도 감시비판하여야하는 국민적인 대야당의 위치를 잃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신문의 공정을 위하여 한마디 보탠다면 모든 신문경영자들이 신문은 자신들의 소유물이 아니고 독자대중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할 것이다. 또 모든 신문기자는 신문을 통한 사회봉사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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