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뜻하는 100가지 단어가 있는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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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가다 아메르, 파란 브래지어의 소녀들, 스테인리스 스틸. [사진 국제갤러리]

“사랑·부드러움·그리움·바람, 그리고 광기와 죽음, 즉 미치도록, 죽도록 사랑하는 것……”

 16일 오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 3관. 이집트계 여성 미술가 가다 아메르(Ghada Amer·50)는 구불구불 그림 같은 아랍어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자신의 조각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들’에 적은 문구였다.

 지름 152.8㎝의 검은 구형 브론즈 조각은 속이 비어 맞은편 글자들이 보였다.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지만 조각품을 이루고 있는 글자는 반대로 적혀 있어 건너편에서만 읽을 수 있다.

 아메르는 “정치와 성(性), 신체와 언어의 양면성을 안과 밖의 구조로 상징화했다. 그림자가 대상만큼이나 중요한 텅 빈 조각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성상숭배를 금지한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아랍권에선 말이 발달했다. 사랑에 대해서도 100개의 단어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바깥에 알려진 아랍 세계의 모습은 사랑보다 폭력에 가깝다. 제발 이런 좋은 말을 많이 사용하자는 뜻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196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난 아메르는 외교관인 아버지와 함께 11세에 프랑스로 이주해 이곳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유네스코상을 수상했다.

 아메르는 이란 출신 미술가 레자 팔콘더와 합작한 자수 회화로도 유명하다. “바느질은 전세계에서 하는 일이며, 특히 여성의 매체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여성의 매체를 새로운 기법으로 삼아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겉보기엔 추상표현주의 같은 서구 주류 사조의 회화를 닮았지만 다가가면 물감이 아닌 실로 이뤄진 선들이 여성의 형상을 덮고 있다. 여성의 모습은 포르노 잡지에서 따온 에로틱한 이미지인데, 눈을 내리깔지 않고 정면을 보고 있다는 게 다르다.

 이런 여성 형상은 높이 182.9㎝의 은색 계란형 조각 ‘파란 브래지어의 소녀들’에도 나타난다. 2년여 전,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 과정에서 한 영상이 SNS를 달궜다. 시위대의 한 여성이 진압 과정에서 군인들에게 구타당하면서 옷이 벗겨져 속옷을 내놓은 채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을 작가는 똑바로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8명의 여성들로 바꿨다. 물리적 폭력을 감수하면서도 민주화를 부르짖은 이 여성의 용기에 대한 찬사다. 아메르의 개인전 ‘그녀에 대한 참고사항’은 다음 달 30일까지 열린다. 02-735-8449.

권근영 기자

[J Choice]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아트인컬처 장승연 기자): ‘아랍’‘페미니즘’ 같은 단어는 버리고, 작가만의 시적인 감수성을 느낄 때 비로소 즐거운 전시!

★★★☆(권근영 기자): 멀리서도 보고, 다가가서도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단어 100개를 꼽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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