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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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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6면

해방전까지 서울시내 20여개소밖에없던 금은방이 지금은 3백여개. 값으로 따져 세계최고, 보급면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대중화한 것이 우리나라의 금이다. 최근「유렵」에서 금매점파동이 일었지만 우리나라는 서북땅에서 노다지가 나왔을때와 6·25때 이미 「골드·러쉬」를 겪었다.
신라금관에서 「버스」차장아가씨의 약혼반지에 이르기까지 금은 널리 깔려있다.
금산출량이나 보유고를 따진다면 「랭킹」하위 「그룹」에 응하는데….
이조말까지도 금은 황실에서나 장신구로 쓰였을뿐 국민대중들은 은이면 최고였다. 한·일합병후 국권을 잃고서 서북에서 금노다지가 발견되면서부터 금은 국민들에게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김광옥 최창학씨가 평북에서 금노다지를, 납북된 방모씨가 역시 서북땅에서 금노다지를 발견, 거부가 되자 이땅에도「골드·러쉬」가 불어닥쳤다.
일확천금을 꿈꾼 지주가운데는 「해머」하나 들고 주유천하하다가 몇 백석을 날린이가 있는가 하면 요절시인 김소월도 한때는 노다지를 찾아 「펜」을 버리고 「해머」하나로 서북땅을 헤매었다.
그러나 30년전까지도 우리나라의 금은 구황실, 지주계급, 도시부유충의 장신구구실밖에 못했다.
중류이하 백성들은 그때만해도 은반지하나 얻어끼고 시집갔던터였다.
당시 서울에는 금세공공예조합이 있어 이들 일부 특수층의 반지, 목걸이, 술잔, 향로, 재떨이, 학병, 이쑤시개를 만들어 바치다 해방10년전 해체되었다.
그때만 해도 금테안경, 금반지, 금시계, 금단추, 금만년필, 그리고도 모자라 멀쩡한 이에다 금 이빨을 해넣고 다닌 돈많은 신사를 볼수있있다.
해방후 물가가 몇배씩 뛰어오르면서부터 장신구역할이 컸던 우리나라의 금은 가치보존수단으로 돌변해갔다. 세공품지금 가릴것없이 돈있고 약삭 빠른사람이면 하루에도 몇번씩 금은방을 찾아 금을 모았다. 은행에 예금하기보다 금을 찾는 수효가 훨씬 많았다.
6·25가 나자 이땅에는 사상 최고의 「골드·러쉬」가 밀어닥쳤다.
당시 모장관부인은 피난길이 늦어 북괴군에 잡혔다가 5돈쭝짜리 금반지를 빼어주고 간신히 부산까지 갈수있었는가 하면 피난갔던 서울상인중 금은상들만은 모두 재기 할수있었다.
금값이 가장 뛴것은 6·25발발에서부터 수복후까지.
일본밀항자, 해외유학생, 해외여행자들은 가장 손쉬운 금을 가지고 나갔다. 이때 해외에 유출된 금이 얼마나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복후 정국이 안정되면서 4·19직전까지 자유당 전성시대의 금은 뇌물로 타락했다.
해방전까지도 구황실이외는 금제품으로 가장 큰 것이 술잔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이때는 중량이 늘어나 순금주전자 이름없는 명함판등의 주문이 권력층과 비위를 맞추려는 사업가들로부터 날아들었다.
지면에 고관발령이 나면 으례 서울시내의 금은상가에는 큼직한 제품의 주문이 있기 마련이었다.
5·16후는 뇌물이 좀 「모더나이즈」하고 「사이즈」가 커졌다. 작게는 1냥에서 크게는 10냥 짜리에 이르는 「행운의 열쇠」를 주문하는 경향이 부쩍늘었다.
순수한 기념품이나 선물의 경지를 벗어나 주고받기에 조금도 어색않고 장식품 구실도 할수있어 열쇠의 주문은 많다는것. 그뿐아니라 어린이의 돌반지도 요즘 대유행. 이래서 우리나라 정부보유금이 약3톤인데비해 금은상의 금은 약11톤이 될것이라 한다.
금은 잡귀와 잡병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한 신앙처럼 되어있다.
해방전까지의 금 보유율은 1만명에 한사람꼴이던것이 요즘은 5백명에 한사람꼴이라는것.「쇼 윈도」에 비친 고객의 얼굴은 세태가 바뀜에따라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금은상가는 변천하는 역사를 실감한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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