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서 괴물본색 드러내는 류현진, 타석에 설 때 별명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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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류현진이 지난달 25일 뉴욕 메츠 전에서 1회 혼신의 힘으로 공을 뿌리고 있다. [뉴욕=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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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류현진(26·LA 다저스)이 18일(한국시간) 미국 애틀랜타 터너필드에서 열린 애틀랜타전에서 5이닝 동안 5피안타·2실점으로 호투했다. 류현진은 4-2로 앞선 상황에서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고 내려왔지만 다저스가 5-8로 역전패하는 바람에 류현진의 승리가 날아갔다.

 류현진은 홈런타자가 즐비한 애틀랜타 타선을 잘 막았다. 이날 류현진의 직구 최고 스피드는 최고 148㎞에 그쳤다. 구위가 평소보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스트라이크존 외곽을 잘 공략하며 위기를 넘겼다.

 방망이 솜씨도 뽐냈다. 1-2로 뒤진 4회 2사 1, 2루에서 류현진이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메이저리그 두 번째 타점을 올렸고 투수로서 매우 높은 타율(0.294·17타수 5안타)을 유지했다.

 류현진은 2006년 한화에서 데뷔한 후 7년간 국내 최고 투수로 활약했다. 메이저리그에선 그도 신인이다. 미국 야구는 분명 한국보다 크고 넓은 무대이기 때문에 류현진에 대한 기대만큼 걱정도 있었다.

 그는 우려를 하나하나 깨고 있다. 돈 매팅리 감독을 비롯해 팀 동료들을 놀라게 했고, 상대 팀들로부터 감탄을 이끌어냈다. 그들 특유의 립서비스를 넘어 상당히 구체적이고, 색다른 칭찬이 쏟아지고 있다. 류현진이 2월 13일 팀 캠프 합류 후 100일도 지나지 않아서다.

매팅리 감독 “힘 아닌 두뇌로 타자 압도”
류현진은 지난 12일 마이애미를 상대로 6과3분의2 이닝 동안 5피안타·1실점으로 시즌 4승째를 거뒀다. 류현진 덕분에 8연패에서 탈출한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은 마스터 크래프트맨(master craftman) 같다”고 말했다. ‘수공예 장인’이라는 뜻으로 피칭의 완급 조절,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찌른 제구력 등을 종합적으로 호평한 표현이다.

 결과는 좋았지만 이날 류현진은 상당히 힘든 투구를 했다. 주심이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극단적으로 좁게 보는 바람에 공 던지기가 힘들었다. 투구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고, 투구 패턴을 바꿨다. 이날 투구수 114개 중 67개를 직구로 던졌다. 이전보다 직구 비중이 훨씬 높았다. 직구를 많이 던져 타자들의 스윙을 유도한 뒤 서클 체인지업(24개)을 뿌리는 패턴이었다. 류현진은 삼진을 3개밖에 잡지 못한 대신 메이저리그 데뷔 8경기 만에 가장 많은 땅볼 아웃(13개)을 유도했다.

 이전 등판 때 구사 비율이 높았던 슬라이더와 커브는 11개씩에 그쳤다. 주심의 성향과 상대 타자에 따라 피칭 패턴을 완전히 달리한 것이다. 경기를 읽는 노련한 안목과 주무기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손재주가 있기 때문에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또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의 투구는 볼수록 흥미롭다(fun to watch). 타자를 힘이 아닌 두뇌로 압도한다”고 설명했다. 매팅리 감독은 그의 큰 덩치(1m89㎝, 115㎏)를 보고 힘과 스피드를 앞세울 것으로 봤다. 류현진은 최고 시속 150㎞ 안팎의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지만 거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힘만으로는 메이저리그의 거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류현진은 미국 진출 후 시속 110㎞대의 느린 커브를 더 많이 던지고 있다. 구속차가 최대 40㎞에 이르는 류현진 피칭은 빠른 공을 더 빠르게, 느린 공을 더 느리게 보이게 한다.

 마이크 레드먼드 마이애미 감독은 “듣던 대로 류현진의 파격적인 투구폼(funky delivery)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체 힘을 충분히 끌어모은 뒤 빠른 허리 회전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게 류현진의 뛰어난 피칭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공을 뒤에서 숨겼다가 던지는 속임수 동작(deception)은 교과서적이라고 할 만큼 완벽하다.

 너무나 교과서적이면 오히려 파격적(funky)으로 보일 수 있다. 류현진의 투구폼이 그렇다. 미국 투수 대부분은 상체 힘으로 빠른 공을 던진다. 파워는 뛰어나지만 류현진의 피칭처럼 정제된 느낌이 없다. 이효봉 XTM 해설위원은 “메이저리그 어느 투수를 봐도 류현진 같은 자세로 던지지 못한다. 전 세계 왼손 투수 중 류현진의 폼이 가장 예쁘다”고 말했다.

네 종류 공을 정확히, 낮게 던지는 게 장점
10여 년 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한국인 투수들은 확실한 무기가 있었다. 1996년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40·은퇴)는 최고 시속 158㎞의 강속구를 뿜어내며 ‘코리안 특급(Korean express)’으로 불렸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속구를 바탕으로 박찬호는 2010년까지 미국에서 활약하며 아시아 투수 최다승(124승)을 거뒀다.

 짧은 시간 박찬호보다 강렬한 인상을 준 건 김병현(34·넥센 히어로즈)이었다. 99년 애리조나에 입단하자마자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그는 빠른 공도 잘 던졌지만 원반이 날아가듯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프리스비 슬라이더(frisbee slider)’와 떠오르는 느낌의 슬라이더인 ‘업슛(up shoot)’으로 유명했다.

 이들이 던지는 공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하는 스터프(stuff·투구)였다. 류현진에겐 이 정도 공은 없다. 대신 자신의 네 가지 구종(직구·커브·슬라이더·체인지업)을 모두 정확하게, 낮게 던질 수 있는 게 류현진의 특장점이다. 감독들은 강한 공을 던지는 선수보다 자신의 공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투수를 더 믿는다. 다저스 포수 A J 엘리스는 “류현진은 (스피드가 아닌) 커맨드(command·구사 능력, 통제 능력)가 뛰어난 투수”라고 표현했다.

 류현진이 지난 1일 콜로라도전에서 삼진 12개를 잡아내며 6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자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은 “류현진은 완급 조절까지 가능한 랜디 존슨”이라고 소개했다. 2009년 은퇴한 왼손 투수 존슨은 시속 160㎞ 가까운 빠른 공을 던지며 통산 303승, 4875탈삼진을 기록했다. 구종은 빠른 공과 슬라이더 두 가지였다.

 월트 와이스 콜로라도 감독은 “빠르고 느린 공을 섞어 던진 류현진의 패턴에 우리 타자들이 내내 헷갈려 했다. 속도 변화가 굉장히 심했다”며 “경기 전 비디오로 분석했지만 실전에서 류현진의 투구는 전혀 달라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류현진은 타자로서도 멋진 별명을 얻었다. ‘베이브 류스(Ryuth)’.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 빗대 LA 타임스가 붙여준 것이다. 지난달 14일 애리조나전에서 류현진이 3타수 3안타를 때린 후 류현진은 타석에 설 때 ‘류스’로 불리고 있다.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은 우리 팀 선발 후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대형 계약을 했다 해도 메이저리그에선 한낱 신인일 뿐이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후해지고 있다. ‘베이브 류스’는 농담일지라도 ‘장인’이라는 평가는 진심이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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