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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변화, 깃발은 '을 위한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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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당은 요즘 ‘을(乙)민주당’이다. 당의 일정·정책·메시지엔 온통 ‘을’ 얘기다. 17일 ‘부처님 오신 날’ 축하 논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승자 독식의 횡포에 신음하는 모든 ‘을’들의 고단한 삶에도 희망이 되길 소망한다.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실천해 ‘을’의 존엄을 지키며 민생정치를 실천하는 ‘을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더욱 용맹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배재정 대변인)였다.

 16일 광주에선 김한길 대표와 72명의 현역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을 위한 광주선언’을 했다. 1600자가 조금 안 되는 선언문에 을이란 말이 8번 들어갔다.

 “갑의 경제권력에 아파하는 을을 위한 경제민주화” “을의 존엄을 지키는 민생정치” “광주정신은 을의 정신”이란 표현을 비롯해 “우리 사회 모든 을을 ‘만민공동회’의 이름으로 묶어낼 것”이라는 말이 담겼다.

 지난 13일엔 ‘을 지키기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위원장 우원식 최고위원)’를 발족했다. 위원회 산하엔 ‘을의 피해 실태를 파악하는 현장조사분과’ ‘을 지키기 입법분과’ ‘을 법률지원분과’ 등 3개 본부가 신설됐다. 당 대표전화·홈페이지엔 ‘을 신문고’도 만들어진다. ‘갑을(甲乙)관계’에서의 을은 경제·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 대기업 임원이 기내 승무원을 폭행하고(라면 상무), 제빵기업 회장이 호텔 주차직원을 때리고(빵 회장), 대기업 영업사원이 나이 지긋한 대리점주에게 폭언하는(남양유업 사태) 일이 한 달 새 연이어 터지면서 갑을관계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한길 대표가 ‘을 드라이브’를 걸었다. 을이란 단어가 민주당의 전면에 등장한 건 8일 망원시장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 때부터다. 김 대표는 첫 현장방문에서 “이제부터 민주당은 한마디로 을을 위한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을 지키기 위원회’ 등이 곧바로 만들어지고 관련 인사가 이어졌다. 김 대표는 기자와 통화에서 “국민의 균등한 생활 향상을 위해,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을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을의 전략을 지휘하는 인사는 민병두 전략홍보본부장이다. 그는 ‘을지로(을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위원회’란 트위터 계정도 별도로 두고 있다. 지난해 민주당의 총선·대선 슬로건인 ‘99%의 정당’을 지우고 ‘을민주당’을 자리 잡게 하는 게 그의 임무다.

 민 본부장은 “‘99%’라는 개념은 미국 월스트리트 시위에서 수입됐는데 매우 대결적이고 분열적인 개념”이라며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하는 1%를 악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부작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사회를 사는 누구나 을이 될 수 있고, 갑 안에도 을이 있다는 측면에서 을이란 단어는 이 시대를 사는 국민 모두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단어”라고 주장했다. 그는 “6월 국회를 통해 ‘을 슬로건’을 제도로 구체화함으로써 새누리당은 물론 제3지대(안철수 의원)와도 분명히 차별화하겠다”고 했다. 수입산인 ‘99%’라는 구호 대신 ‘을 마케팅’으로 새누리당 및 안철수 세력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을의 정치’에 포퓰리즘에 대한 반성도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을을 위한 광주선언’에서 민주당이 강조한 것이 대립을 극복하고 선정주의 정책과 결별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을의 정치’가 도리어 인기 영합주의적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남양유업 사태와 같이 대중적 관심이 높은 사건에 올라탄 대증요법이 아니냐는 거다. ‘을의 분노’에 편승한 정치공학적 접근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민 본부장은 “5월 4일 전당대회 이전부터 새 지도부와 함께하기 위한 우리의 슬로건을 을로 생각하고 있었다”며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더 많이 쓰일 필요가 있다. 6월 국회의 입법 활동을 보면 인기영합이란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을을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선 민주당 스스로 갑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지난 8일 정홍원 국무총리는 김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민주당이 더 갑인 거 같다”고 해 갑론을박이 벌어졌었다. 정부조직 개편안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반대 일변도로 나왔던 민주당을 꼬집은 것이다. 당 안팎에서도 진정한 을의 정치를 하기 위해선 기득권을 내려놓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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