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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과거사 배상, 증거재판의 예외일 수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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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의 진실규명 결정만으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상당수 과거사 사건에서 사실관계 판단을 과거사위 결정에 의존해온 하급심 판결에 제동을 건 것이다. 과거사 배상 재판이 어떻게 진행돼 왔고, 또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 짚어봐야 할 때다.

 어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진도군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과거사위 조사보고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으나 보고서 자체의 판단 내용에 모순이 있는 등 구체성이나 관련성, 증명력이 크게 부족하다면 추가 증거 조사를 통해 개별적으로 심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소멸시효 기간을 ‘진상규명결정 후 3년’으로 제한하고 위자료 액수에 대해선 “형평성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상당수 하급심이 과거사위 결정만 있으면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이 지적한 것처럼 과거사위 보고서에 피해경위 등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없을 때도 배상을 인정하는 등 무리한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과거사위가 제한된 인원과 시간으로 피해 상황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 의문이 제기돼 왔다. “희생자 가족 등의 진술만 듣고 판단했고 반대 증거를 살펴볼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는 법무부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손해배상을 포함한 민사사건은 증거재판의 원리에 따라 재판에서 사실관계를 가리는 것이 원칙이다. 불행한 과거사와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도 이러한 원칙의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

 국가의 불법 행위로 생명과 자유를 빼앗겼던 이들에 대한 배상은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과정이다. 그렇게 중요한 배상 재판이 통일된 판단 잣대나 충실한 사실 조사 없이 진행돼온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과거사 배상의 법적 정당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