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화 자주 내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는 40대 남자 CE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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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가 의뢰할 고민은 75세인 아버지에 관한 겁니다. 저는 부친이 일구어 놓은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는 40대 남자입니다. 남들은 불경기라 사업 하기 어렵다지만 저는 회사 운영보다 부친 모시기가 더 어렵습니다. 부친은 “살 만큼 살았고 죽을 날 얼마 안 남았으니 남은 여생은 편히 쉬련다”며 2년 전 저에게 경영을 다 일임하고 명예회장직만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말씀과 달리 저한테 아무 상의 없이 임직원을 불러 사소한 걸 트집 잡아 야단치고 업무 지시를 하니 당황스럽습니다. 아쉬움이 남아 그런 것이려니 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 해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어머니까지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부친이 별것 아닌 일에 역정을 버럭 내셔서요. 참다 못해 얼마 전에 모친이 “황혼이혼해야겠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부친은 임직원과 가족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할 정도로 아무 병 없이 건강하십니다. 그런데도 계속 건강 걱정입니다. 일 년에 건강검진을 두 번 받으실 정도로요. 아버지 심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윤대현 교수

A 어르신들 말씀 중 “살 만큼 살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기에 어르신들 입장에서 호상(好喪)이란 없습니다. 가족과 지인을 위한 힐링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젊은 층이 오해를 합니다. 40~50대에 열심히 살고 60세 언저리에 은퇴한 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오해 말이죠. 또 은퇴 후엔 마음을 비우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나이 들수록 죽음을 잘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줄고 포용력은 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긴 분명히 죽는데 조물주는 언제 죽을지는 모르게 해 놓았습니다. 만약 자기가 죽는 날짜를 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불안감에 휩싸여 극단적인 행동을 하든지 아니면 자포자기로 대충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은 나에겐 먼 단어”라며 막연히 영원히 살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힙니다.

 오늘 사연의 주인공인 아버님은 정체성의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사업가이고, 가정 내에서도 자식 잘 키워놓고 멋진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과거 시제입니다. 감성적으로 만족감을 얻으려면 바로 지금, 그러니까 라이트 나우(right now)에 내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인간이 불안하고 언짢게 느끼는 감성적 고통 중 가장 큰 게 자기 정체성이 희박해지는 겁니다. 서글프게도 올해 한 살 더 먹은 만큼 내 존재감은 희미해집니다. 양귀비처럼 아름다웠던 여인도 시간을 거꾸로 흘러가게 할 수 없고, 힘이 넘치던 남성도 근육의 퇴화와 위축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적인 사람은 좋지 않다고 흔히 얘기하지만 사실 사람은 모두 이중적입니다. 동시에 두 가지 생각과 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워하는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뇌는 감성과 이성 시스템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이성이 이끄는 삶을 살라고 하지만 누구도 감성을 완전히 조절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성이 항상 이성을 이깁니다. 감성이야말로 보다 본질적인 동기 부여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사연 주신 분의 부친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아래 회사 경영을 넘겼을 겁니다. 하지만 감성만 놓고 본다면 그 변화는 간단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회사에 애정이 많은 차원을 넘어 정체성의 문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새로운 역할로의 변화(role change)가 쉽지만 우리 감성은 이성만큼 새로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시어머니가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살림은 잘하고 있니, 우리 아들 아침 밥은 챙겨 먹이니”라고 잔소리하는 건 단순히 며느리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엄마라는 자기 정체성이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불안 증상입니다.

 역정과 잔소리가 느는 건 자기 스스로 약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약한 남자는 루저(실패자)’란 틀이 남성의 뇌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세월로 인해 약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 해도 이를 잘 수용하지 못합니다. 어르신들의 분노는 “나 아직 살아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호소력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회피하니 본인은 더 외로워지기 쉽습니다. 외로워지고 나면 ‘주변에서 나를 무시한다’며 노여움이 더 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건강에 대한 염려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인생을 잘 산 사람일수록 여한이 없을 것 같지만 경험으로 봤을 때 오히려 반대입니다. 삶이 고단했던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많은 것을 성취할수록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허무가 몰려옵니다. 고생해서 이만큼 이루었는데 마음의 만족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무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희생의 보상을 얻을 시간이요.

 제 클리닉엔 건강 걱정 때문에 찾는 어르신이 많습니다. 실제 질환보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더 무서운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고 하면 처음엔 힘들지만 놀라운 적응 능력으로 그 6개월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건강 염려는 다릅니다. 10년을 살더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데 삶의 가치가 없는 겁니다.

 노년의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매우 능동적입니다. 덤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입니다. 우리 뇌는 과거의 행복 약간과 바로 지금의 행복을 합해 우리 인생 전체의 행복점수를 매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생존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생존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생존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노년을 맞으면 허무에 쫓기며 생존에 급급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노년은 결코 심리적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노년을 잘 보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는 건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내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청소년이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돌과의 관계에서 경쟁에 지치고 추락한 자신의 정체성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죠. 좋은 사람과 만나서 같이하는 놀이는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이미지가 거울처럼 내게 비추어지기 때문에 내 마음까지 푸근해집니다. 우정이 좋은 것은 상대방이 나를 따뜻하고 근사하게 인식해주기 때문입니다. 남이 날 사랑한다고 느껴야 내가 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문학, 예술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은 없지만 그 안에 보편적 인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가치를 느끼게 해줍니다.

 노는 것도 젊어서 해봐야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젊어서 놀아야 합니다. 이미 70세가 넘었는데 어떡하냐고요. 제 클리닉을 찾은 100세 어르신은 앞으로 20년 더 살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노년이란 상대적인 사회학 용어일 뿐 감성적으론 누구나 항상 젊은이입니다. 바로 이 순간, 내일의 나보다는 더 젊은이라는 말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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