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각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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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해의 계획과 희망을 다듬고 마무르기 전에, 갑자기 세상이 소란해졌었다.
월남전선 곳곳에서 싸움의 불길이 새로 튀어을랐고, 아닌 밤중에 흥두깨처럼 수도 서울한변에서까지 죽음의 그늘이 깔렸었다. 놀라운 일, 억울한 일 많이 당해온 우리 국민은 다시한번 놀라고 어리둥절 하였다. 「푸에블로」호 납치에 뒤이은 판문점회담사태등은 우리의 주권에 대하여 회의하게도 했고, 우리자신의 처지를 반성하게도 했다.
어떻든 세상은 어지럽고 험하고 위태릅게 됐다. 어쩐지 금년은 앞으로도 국제·국내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이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주변에서 국민과 군인이 많이 생명을 잃고 상하니, 우리도 죽을 각오는 해두어야만 할 것같다.「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라고 했다지만 내가 철학을 한다 해서 죽음을 연습할만한 계제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죽음의 현상이 잦으니 죽을 각오에 대한 생각이 가끔 머리에 오락가락한다.
철학하는 이로서는 숨어사는 것이 제일좋아 보인다. 내로라하고 뽐내며 사는 것은 우습고 개죽음은 하고싶지 않다. 무슨 의미있는 일을 하다가 또 좋은 업적을 남기고 죽고싶다.
인류에게 정말 유익하고 삶의 보람을 주는 것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학문과 예술이라 생각되니 이런방면에서 무슨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면 한다. 미국이 월남전쟁 외에 다시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점은 도저히 있음직한 일이 아니므로 3차대전의 위험성은 희박하지만 만일에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막대한 수의 인간이 이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는 것이 상식이되어있나.
그런데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부산에 땅값이 올랐다고도 하고 시장에「룩새크」가 동이 났다고도 들린다. 다 넉넉한 사람들의 하는 일이다.가난한 사람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은 이것드 저것드 못하니 죽을 각오나 해야 되겠다.
갑자기 죽는다고 하면, 깨끗이 죽었으면 한다. 죽기 전에 좋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소원이로되, 그렇게도 하지 못한 바엔, 죽음의 자세나마 깨꿋하여 인간다움의 빛을 발했으면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에 관한 상상 때문이라고 옛날 현인은 가르쳤다. 그 상상을 끊고 죽음을 직시하면 공포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이 닥쳐을 때, 보람있는 일을 위하여 아름답게 그리고 웃으며 죽을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명관<숭실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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