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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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구순에 이르도록 줄기차게 학필을 잡아온 문인화가영운 김용진씨가 14일밤 서울운니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의 김옹은 2년전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뒤에도 간간이 붓을 들었으나 손이 떨려 한폭그림을 이루지 못했다고 미망인 장현경(72) 여사가 전한다.
영운, 향석, 구룡산인, 절향각주인등의 별호를 가진 그는 예스런 의미에서의 마지막문인화가. 정치가 혹은 선비의도락으로서 그는 사군자와 절지화를 즐겨쳤다.
또한 이조말기 안동금씨 세도의 종지부가되는 김옹은 영의정 김병국의 손자. 본시 수원군수, 내부지방국장을 거쳐 동지돈령사사직에까지 올랐다. 동지돈녕사사는 임금의 숙당에게만 주는 특별한 한직으로 종이품가선대부. 지금의 차관급에 속한다. 이점 망건 관자에 금·옥을 단 옛 벼슬아치로서 그는 최후의 인물이된다(옥관자는 정삼품, 금관자는 정이품, 환옥관자는정일품).
선비로서 그의 도락은 거문고였으나 고종이 세상을떠나자 풍악을 버리고 채필을 잡았다. 화가가되기위해서가 아니요, 선비(양반계급)의 교양으로 망국한을달래기 위한 예도였다.
그것이30세. 안심전·이관재등 당시 화원과 교류하고 중국의 명화가 방자역이 내한했을 때는 모셔다가 그림을 배웠다.
『둔필이지만 하도 하니까 늘데』그의 생시의말이다. 그는 바둑도 장기도 모른다. 반평섕을 오직 그림에만 몰두, 작품을 짐으로 실어낼만큼 전념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그림은 헤아릴수없이 많다. 또 많은 친지에게 보낸 선사품으로 전한다.
그럼에도 병풍하나, 액자하나 찾아볼 수 없는 화가의 빈소. 그의 작품한폭마저 남은게없다. 친지들이 휘필을청해 보내온 화선지가 더미로 쌓여 있을뿐. 말년의 기울어진 가계로 말미암아 그의 아끼던 고서화도 이미 남의것이 되고 없다.
수와 부와·귀를 다누린 마지막 이조인. 그는 문인화가란 이름만 남기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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