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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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밤중에 전화 「벨」이 울린다. 어느 때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화기를 든다. 부산에서 걸려온 장거리 전화였다.
『잘 들 있냐?』 『괜찮다구?』 『출입 삼가라.』 『아이들은 아예 집에 가두고….』
이 밤중에 비상 전화는 서울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출입 삼가라!』 -.
어른의 분부지만, 수화기를 막고 고소를 참지 못한다.
서울에선 사뭇 시가전이라도 벌어졌다는 식이다. 총격전이 계속되고, 수류탄이 날아다니고, 중무장군경이 곳곳에서 총을 겨누고….
『임시 「뉴스」! 서울 교외에서 살인 유격대 잔당들과 교전 중!』 「라디오의 「스포트·뉴스」. 통금 단축. 『부엌에 뛰어든 살인마』, 『「헬」기 밤새껏 조명탄』, 『유격 잔당, 서울서 출몰』…. 그리고 부산에선 수상한 대화. 『핵 항모, 원산만에 출동』, 『연대장 이 대령 전사』 『중대장도…』…아직도 『서울 근교에 일부 잠복』-.
세상이 이쯤 뒤집히면 시가전 정도가 아닐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기로는 방금 전쟁이 머지 고야 말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서울을 시가전장으로 연상하는 노인의 근심은 기우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불과 31명의 무장 간첩이 나타났을 뿐이다. 1백명쯤 되었더라면 세상의 「패닉·무드」 (공포 분위기)는 어느 지경이 되었을까. 실로 실소를 자아낸다.
생각하기 나름으론 군·경의 「언밸런스」도 눈을 거스른다. 아무려니. 연대장·중대장·경찰서장이 전사하는 작전이 과연 잘 된 것인가. 짜임새, 침착성, 신중성, 어느것 하나 갖추어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산돼지라도 몰듯이 즉흥적이고, 즉발적인 느낌이다. 시민의 간첩 오인 사상도 물론 그만하면 규모는 작았지만, 없느니만 못했다.
세상이 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혹시나 반사 작용이 아닐까. 넋을 놓고 멍청히 앉은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을 때의 그 반응 같은….
사회는 이 몇해째 소비·낭비의 「무드」속에서 어줍잖은 밀월 기분에 잠기고 그런 「스포일」속에서 우리의 내부는 어느 구석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지금 격앙과 허탈의 틈바구니에서 동해의 핵 항모나 바라보며 하회를 기다릴 수만 은 없다. 깊은 생각과 각성 속에서 이 시간을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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