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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공예 고미군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 많은 자연의 신비로운 색깔을 우리생활주변의 여러 가구에 옮겨 담기 위해 공들이고있는 규수 공예가 고미군양이 오늘도 책속에 파묻혔다.
『너무 일찍 추천작가가 된 것 같아요. 실속없이 떠벌이기 보다 작품하나라도 알차게 하려면 이론이 단단해야하는데요.』
지난해 연거푸 4회 국전에 특선을 움켜쥔 죄(?)로 가장 나이어린 추천작가가 된 그는 올봄에 대학원에 가기 로했다.
『고려청자 같은 하늘 속을 둥둥 떠다니는 이조백자 같은 구름-얼마나 많은 우리선인들이 그 색깔을 숱한 작품 속에 옮겨담기 위해 끈기를 다했을까…그래서 저는 마음에 드는 색깔이 떠오르지 않을 때 항상 강둑을 거닐곤 하지요.』
공부에는 늦는 법이 없다고 다짐하며 뛰어든 대학원에서 그가 하고픈 것은 물들이기(날염).
『날염에는 감이 좋아야죠. 짜임새도 좋아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동양적인 것, 좁혀서 우리 고유의 것을 고를 참예요.』
『왜 우리 것이 없겠어요. 비원에 있는 창살무늬 같은 것을 현대화 시킬테야요. 덕수궁·창경원·경복궁과 서울근교에 있는 옛 곳에서 무늬들을 모두 사진으로 담아 모아 놓았어요.』
덕분에 그의 사진기술이 전문가 뺨치게되었단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면 경주·부여등지와 해인사·법주사 등을 모두 들러 기록해두는 것이 그의 크나큰 바람이 됐다.
한국의 멋을 좇는 그가 이화여중2년때는 멋없이 이리저리 뛰는 정치외교가를 꿈꾸었던 철없는 소녀였다. 이화여고2년때 서울미대가 베푼 전람회에「데상」과 판화에 입선한 뒤 마음을 고쳐 잡았다.
5명이 의약계통인 집안에서 그만이 생활미술전공으로 백태호교수의 지도를 받게됐다.
64년봄 신인예술전에 공예작품으로 첫 입선을 한 뒤 그 해 가을 국전에서 머릿장과 현대식 병풍(스크린)으로 각각 입선 및 특선을 차지했다.
그 후 연이어 가죽염색의「스크린」머릿장 등으로 특선을 거듭하여 4년만에 추천작가가 됐다.
『추천작가라는 게 무거운 짐 같아요. 홀가분하게 벗어버리려하다 추천작가끼리 경쟁을 시킨다는 약속도 받았고 매년 꼭 작품을 내야하는 것이 자극이 될 것 같아 받아들였어요.』 그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너무 구상화된 것은 곧 싫증이 나요. 가구를 가진 사람이 무궁무진한 친근미를 가지려면 반추상화가 어쩔 수 없지요. 제목도 쓸데없는 셈이죠.』
『「워커힐」의 한국요리점같이 우리 것을 엉터리 현대화시킨 것을 보면 의욕이 생겨요. 나중에 테두리에 틀어박힌 선배소리나 안 듣도록 공부해야죠.』
여성다운 한국인의 끈기로 은근한 우리의 멋을 담은 작품이 그에게서 오는 가을 부끄럼 없이 내놓아질게다-. 그가 부질없는 욕심을 내지 않고 공들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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