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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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엄만 고향이 어디야?』 『네 고향은 어딘데?』 『난 서울이지.』 『그래, 엄마도 너랑 같애.』 어느 날 고향이란 낱말을 새로 배운 듯한 어린 아들과의 대화였다.
고향이 무엇일까?
어린 아들이 던진 질문이 의외로 내 마음을 파고든다. 국어사전을 펴보았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한영사전을 찾았다. 「네이티브·플레이즈」혹은「네이티브·타운」등으로 쓰여졌다.
고향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고장을 뜻하는 말일까? 한국에서 나지 않은 나의 경우에 그 외국지명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따금 필요에 따라 출생지라고는 하지만. 그 곳에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오래 산 것이 아니라 무척 이사를 많이 하고 학교를 일곱번씩이나 전학했으니 고향이란 낱말 뜻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얼른 댈만한 고장이 없다.
세모의 어수선한 거리에서 왜 그런지 망향의 정을 느낀다. 나에게도 분명 고향이 있다. 어렸을 때의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인정에 얽힌 사연들이 첩첩이 쌓인 아름다운 고향이 있다. 어느 틈엔가 꽃과 놀과 단풍과 함박눈 등의 전원적인 풍취마저 깃들인 고향이 내 마음속에 생겼다. 여기저기에서 겪은 일들이 한데 합쳐서 멋진 고향그림을 만들어놓았다. 나처럼 보헤미언적인 어린 시절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고향이란 뜻은 자기가 난 고장의 풍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심 인정 속에 겪은 자기 생의 연륜이 포함된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고향 그리는 정은 해가 갈수록 더한 것이 아닐까.
올해는 동지팥죽을 끓일 겨를도 없이 바빴지만 무리해서 조금 끓였다. 아이들이 얼마나 즐겁고 맛있게 먹는지. 작은 성탄목을 같이 꾸미면서 먼 훗날 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져 남을 고향을 생각했다.
큰아이와 둘째 아이가 1년 동안 모은 저금통을 깨뜨려 식구들에게 나눌 크리스머스 선물을 사왔다. 비밀이라고 하면서 저희들 방 근처에 딴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선 열심히 포장을 하는 모양이다. 시끄럽고 좁고 거리에는 쓰레기와 연탄재가 뒹구는 이 고장이 내 아이들의 고향이라지만 부디 아름다운 사연들을 간직하라 빌며 나는 안방에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몰래 꾸린다.
이상금<이대교수·아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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