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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남국의 세모 | 세 번째 성탄 맞는 주월국군 |<희망의 계단>(17)접전 만여회·휴식의 한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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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군은 월남에서 세 번째의 세모를 맞았다. 2개 육군사단과 1개 해병여단 및 그지원부대 4만8천명으로 편성된 주월국군은 그동안 9천9백여회의 크고작은 싸움에서 월맹정규군을 비롯한 공산군 1만2천4백70여명을 사살하고 3천55명을 사로 잡았다(12월1일 현재)

<친한 감정 증진노력>
월남에 병력을 처음 보낸 것은 이동외과병원이 「봉타우」에 닿은 64년9월22일. 그러나 그보다 2년전인 62년 5월 10명의 장서으로된 군사시찰단이 월남의 군사정세를 살폈었다. 64년 비둘기부대가 파월된 뒤 그해 10월31일에는 주월한국대사와 월남외무장관 사이에 주월한국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 또 그 이듬해인 65년8월에는 한·미, 한·월군사 실무자협정이 맺어져 전투병력의 파월에관한 길을 트고 파월 군의 작전·지위·처우 및 국수지원등에 이르는 여러 특권이 확약되었다. 전투부대인 「맹호」와 주월군사령부가 월남에 닿은 것은 이러한 교섭이 끝난 그해10월이었다.
한·월의 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고려조에 이른다. 13세기 월남의 왕자 이 용상이 나라를 잃고 표류되어 닿은 곳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리. 그는 귀화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6, 17세기에는 진주사람 조완?이 안남(현 월남)을 내왕했고 제주도민이 안남에, 안남상인이 제주도에 표착한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이조실록).
그러나 본격적인 유대관계가 맺어지기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두나라가 모두 남북으로 갈리고서 부터다. 56년 첫외교사절을 교환한 양국대통령의 상호방문으로 급속히 가까워졌으며「아시아」민족반공연맹등을 통해 반공전열에 함께 서 왔다. 그러나 요즘 월남에서는 일목 한국 민간 기술자들의 하렴치행위와함께 월남인의 대한감정이 흐려지고 있는 사실이 논란되고 이에 대한 대책이 검토되고 있다. 주월군당국은 민간기술자들을 우리군재에서 다루도록 법적 뒷받침을 마련할 것을 건의했다.
정부는 지난9월1일 월남에서 해외기술자의 고용통제법이 발효되고 민간기술자의 국위를 해치는 행위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는 이곳 대사관의 보고에 따라 (1)기술자는 물론 시찰단·연예인단등의 출국입국통제 (2)범법자의 소환등 종합대책을 마련코 일부 추락된 국위를 다시 회북하려하고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못하고있는 실정이다.
현재 월남에 있는 외국인상사나 한국인상사에 취역하고있는 우리기술자는 약1만2천명에 이른다.
올해 들어 10월말현재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돈이 4천3백만「달러」(1백20억원)에 이른다. 요즘 이곳에서는 한국인으로 편성된 군수지원단의 파월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월남후방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이용역단의 파월은『아직 시기·인원등 문제에 아무런 합의를 보지못하고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한국정부가 용역단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국군의 구성요원 즉 군속으로 편성할 것이라는 얘기가 간혹 떠돌고 있다.

<숙제…용역단 파월>
물론 군속으로 용역단을 구성할 경우 『군사요원의 권한은 월남의 우방군과 동등하며 한국군사령관은 국군과 관련 있는 한국인입국을 사전에 월남군사령관에 연락한다』는 한·월군사밀무자협정 17조에따라 번거로운 절차나 지위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만 실익 면에서 크게 후퇴하는 결과가 될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제 국군은 또 한해를 월남에서 맞이한다.
끈덕지게 논의된 주월국군의 작전지역이동 및 증파·용역단파월등 군사적인 숙제와 함께 인력수출· 경제진출등의 어려운 과제를 안고―.

<글 조성각 기자, 사진 김용기 기자>
카메라=니콘F, 35밀리 렌즈 500분의1초 F, 11필림 엑타크름 A·S·A 64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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