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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음서 제도인가, 조직 충성도 진작책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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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호 22면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생산라인. 이 회사는 생산직 신규 채용 때 정년퇴직자 등의 자녀 1인에 한해 가산점을 주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그룹의 노사관계가 연일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 윤갑한 사장과 문용문 노조위원장은 지난달 26일 주말 특근을 위한 교대 방식과 추가 임금에 합의하고 이달 4일부터 주말 특근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만둔 노조 전문 윤여철 부회장이 지난달 24일 복귀해 협상을 지휘했지만 현대차 내 각 공장 노조 대표들이 집행부의 합의에 반발하면서 4일 특근을 거부했다. 지난 3월 이후 모두 9차례 주말 특근을 못한 것이다. 생산 차질은 총 6만3000대(1조3000억원)에 달한다. 주말 특근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신형 SUV인 맥스크루즈는 지금 주문해도 6개월가량 기다려야 인도받을 수 있다.

기아차 노조, 자녀 세습채용의 명과 암

노조 집행부의 결정에 공장별 노조가 반발하는 것은 오는 9월 현대차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노-노 간 샅바싸움’ 탓이다. 기아차 노사관계도 매끄럽지만은 않다. 노사 양측은 지난달 장기근속자 직계 자녀 입사지원 시 가산점을 주기로 합의했지만 노조 내부에서도 비난 여론이 불거지는 상황이다.

최근 기아자동차 노사가 광주공장 생산직 신규 채용에서부터 장기근속자 자녀에게 일부 가산점을 주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관계자는 25일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직계 자녀 한 명 중 본사의 채용 규정에 부합되는 인재가 있다면 일부 가산점을 주는 방안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도제식 기술 업체는 가족 채용이 유리”
노사 양측은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 재직자의 직계 자녀가 이 공장의 신규채용에 지원해 1차 전형(서류)을 통과한 경우 2차 전형(필기시험과 면접) 중 면접점수의 5%(3.5점)를 가산해주기로 했다.

이 회사의 생산직 모집은 ‘서류(1차)-필기고사면접(2차)-신체검사(3차)’의 3단계 전형을 거쳐야 한다. 2차 전형은 면접(70점)과 필기고사(30점)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다. 기아차 노조는 당초 1차 전형에서 장기근속자 자녀에게 10%의 가산점을 주다가 이번에 제도를 바꿔 2차 전형에서 가산점을 주는 쪽으로 개정한 것이다. 노사는 또 2차 전형에서 총점 동점자가 나왔을 때는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 측은 “서류전형에서 가산점을 받는 것보다는 면접 단계에서 가산점을 받는 게 최종 합격에 더 유리하다는 점을 노조 측에서 염두에 둔 것 같다”고 말했다.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인 벤틀리의 영국 크루(Crewe) 공장에는 가족이 대를 이어 이곳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공장의 VIP 투어를 담당하는 나이젤 로프킨의 가족이 대표적이다. 33년째 이 공장에 몸담고 있는 로프킨은 이곳에서 목공 분야의 장인으로 근무해왔다. 그의 딸도 최근 벤틀리에 입사해 가죽 파트에서 근무 중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아들도 이곳에 입사가 예정돼 있다. 벤틀리코리아 측은 “럭셔리 자동차를 만드는 만큼 생산 노하우를 가진 직원들이 장기간 근무해줘야 안정적인 인력 운용이 가능하다”며 “또 손작업이 대부분인 제품 제작 특성상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아 가족 단위의 직원을 많이 뽑고 있다”고 설명했다.

벤틀리 측은 특별히 명문화된 가족 우대 채용 제도를 두고 있진 않다. 하지만 직원들 대부분이 10년 이상 근무하는 만큼 자연스레 동료의 가족을 알게 되고, 이들이 입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산업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인 1970~80년대에는 노조 내부에서 가족 등을 신입 직원으로 회사에 추천해 채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12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 최대의 신사화 브랜드인 로이드(LLOYD)도 직원 채용 때 가족을 일정 부분 우대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이 덕분에 독일 슐링엔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 500여 명은 대부분 본사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다. 이 회사는 가족 우대뿐 아니라 직원 스스로 근무시간을 정하는 탄력근무제와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하도록 한 ‘순환업무제’ 등을 도입하고 있다. 직원이 원하면 정년인 60세 이후에도 공장에 남아 일을 할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직원들의 숙련도와 충성심을 높인 덕에 이 회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매출이 매년 10% 이상씩 늘고 있다. 동남아 지역의 구두공장들보다 10배 이상 비싼데도 이 같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

이 회사와 오랜 기간 거래했던 롯데백화점의 김훈성(38) 매니저는 “가족이 대를 이어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레 제화기술을 익힐 수 있는 데다, 직원 모두 회사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을 공유하고 있었다”며 “1985년 제네바 군축회담 당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이 회사의 신발을 신고 회담에 임해 화제가 된 것도 결국 그런 기술력이 하나하나 쌓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항공기 제조회사인 보잉과 거래하는 코러스 알미늄 역시 매년 20여 명씩의 종업원 자녀를 직원후보생으로 받아들여, 소정의 교육 기간을 거친 뒤 채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직원 가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도 한다. 현대차 노조도 기아차보다 앞서 2011년 임금 및 단체협약안에 “회사는 인력 수급 계획에 따라 신규채용 시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 근속자의 자녀에 대해 채용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요구 조항을 넣어 이를 관철시킨 바 있다. 당시 노조 대의원대회에서는 이 같은 ‘세습채용’ 요구안을 없애자는 안건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이 조항은 지금도 유효한 상태다.

대를 이은 고용을 통해 생산 노하우를 전수하고, 조직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보장하는 게 기업 입장에서 나쁜 일만은 아니다. 현대차그룹 측은 “기아차 노조의 요구가 전혀 능력이 없는 사람을 뽑자는 것도 아니었고, 채용 기준에 합당하고,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 중에서라면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대하자는 취지여서 회사 쪽에서도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같은 ‘가족우대’ 조항이 입사 전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상민 의원(새누리당)은 ‘2012년 현대자동차 신규채용 현황’을 공개하며 “지난해 현대차 직원 자녀의 합격률은 1.02%로 일반인 합격률(0.38%)보다 2.7배가량 높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차 측은 “단협상의 직원 자녀 우대 조항 덕에 입사 여부가 갈린 것은 3명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노동계선 대체로 일자리 세습에 부정적
현대차나 기아차 외에 직원가족 우대 조항을 가진 기업은 또 있다. 쌍용자동차는 업무상 재해로 퇴직한 가족이 있는 경우, 한국GM은 부모가 장기근속자 또는 정년퇴직자일 경우 각각 ‘동일조건일 때 직원 자녀를 우대한다’는 단체협약 규정이 있다.

현대중공업도 ‘다른 구직자와 조건이 같을 때 부모가 직원일 경우’에 한해 생산직 선발 시 우대한다는 조항을 갖고 있다. 하지만 쌍용차와 한국GM은 수년간 생산직 직원을 모집하지 않아 사실상 이 규정은 사문화돼 왔다. 현대중공업 측도 “실제로 이 규정 덕에 뽑힌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가족 우대 규정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각 기업 노조들이 넘어야 할 산이다. 익명을 원한 노동문제 전문가는 “기업들마다 근로환경이 판이하게 달라진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현대ㆍ기아차처럼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능력이 있는 회사의 노조에서 자기 가족을 우선해 뽑겠다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해당 회사의 비정규직 직원이나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하나의 횡포로 비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에서 SK에너지와 S-OIL 같은 일부 대기업 노조도 2000년대 중반 ‘채용 시 직원 가족 우대’ 규정을 신설했다가 반대 여론에 막혀 이를 자진 철회하거나, 노사협상 과정에서 무산됐다. 일반 기업뿐 아니라 한국전력이나 한국가스공사 같은 공기업도 소속 직원이 ‘업무상 재해’ 등의 사유로 순직하거나 상해를 입게 되는 경우 직계 자녀 1인을 특별 채용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에 규정했다가 이를 철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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