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숫자 0을 사용한 기록은 기원전 2세기 바빌로니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 용어인 ‘공(空)’에서 유래한 0은 7세기가 돼서야 숫자로 인정을 받는다. ‘0+0=0, 0+a=a, 0×a=0’ 등 사칙연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숫자로 인정을 받아도 0은 0일 뿐이다. 0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은 올해 1분기 경제가 전기 대비 0.9%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예상보다 훨씬 나은 ‘깜짝 성장’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8분기 연속 ‘0%대’의 저성장인 것은 분명하다. 인구 증가율까지 고려한다면 실질성장률은 더 낮아질 수 있다. 0의 의미가 그렇듯, 한국 경제는 아무것도 없는 공(空)인 셈이다.
앞으로의 경제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1981~2002년 세계 평균 성장률이 3.2%에 머무는 동안 한국은 2배가 넘는 7.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3년 이후 한국 경제는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에 역전당했다. 이 기간 동안 세계 평균 성장률은 3.8%인데 우리는 3.6%에 그쳤다. 최근에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인 한국이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인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비슷한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한창 커야 할 청소년이 다 큰 성인과 같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텅 빈 한국 경제에 위기감 역시 ‘0’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듯하다. 정치권에서는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강화하고, 기업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사업에 제한을 가하는 정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여야가 올 상반기까지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한 36개 경제법안 가운데 70%가 기업규제 관련 법안이라고 한다. 일부 근로자와 업계도 경쟁력 강화와 국민 경제를 생각하기보다는 제 몫 챙기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성장은 결국 서민을 힘들게 할 것이다. 소비자의 지갑이 닫힌다면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은 좌판을 접어야 한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도 한국의 중산층 절반 이상이 적자 가구인 ‘빈곤 중산층’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90~97년 경제성장률이 7~8% 안팎이던 고성장기에는 중산층 비중이 75%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3~4%의 저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중산층 비중은 60%대로 급락했다. 장기 불황이 지속하면 서민은 절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성장이 멈춘다면 서민들의 웃음도 사라질 것이다.
저성장이 계속 이어지면 세수 감소도 불가피하다. 지난해 정부는 올해 세수 목표를 216조4000억원으로 잡았다. 이는 경제성장률이 4%라고 가정하고 산출한 것이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2%로 낮아지면 세수는 더 줄어든다. 얼마 전 정부가 제안한 추가경정 예산안 20조원 중 절반이 넘는 12조원이 올해 세입 부족분을 메우는 데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추경이 세수 부족분의 해답일 수는 없다. 세수 부족은 복지 재원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저성장 사회에서는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있는 과실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세계적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들은 저성장 및 고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집권 2기 첫 국정연설에서 중산층 일자리 창출로 경제를 회복시켜 미국 경제의 성장엔진을 재점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강한 일본을 위해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며 엔화 약세, 법인세 인하, 규제 철폐 등 전방위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세계 각국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데 우리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한국 경제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돌파한 후 지난해 기준 2만2700달러로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이다. 더 늦기 전에 저성장 극복이 우리 사회의 핵심 담론이 돼야 한다. 우리 모두가 0%대의 저성장을 위기로 느껴야 한다. 0은 아무리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눠도 결국 0이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