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입주기업들 "도산의 무덤에 한발씩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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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가서 남아 있는 원자재나 완제품이라도 가져와야 하는데….”

 30일 오후 1시, 한재권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를 빠져나왔다. 이날 한 회장을 비롯한 입주기업 대표 30여 명은 방북을 위해 남북출입사무소에 모였다. 하지만 북측은 이번에도 방북을 불허했다. 지난달 17일과 22일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차에 오르던 한 회장은 “북측이 원하는 대로 근로자들의 월급을 주려면 현금 수송차량이 개성으로 가야 한다”며 “현금 차량이 북으로 갈 때 같이 들어가 완제품이라도 가져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이날 오후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를 만나 입주기업들을 위한 조속한 지원책 마련을 요청했다. 또 다른 입주기업 대표들도 이날 서울 무교동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처에 삼삼오오 모였다. 무교동 사무실은 개성공단 사태 이후 대책을 논의하는 입주기업들의 ‘비상상황실’이 됐다.

이곳에서 만난 정기석 SnG 대표는 “섬유·의류 제조사인 본사는 대전에 있지만 개성공단 사태가 터지면서 대책 마련차 매일 서울에 올라온다”며 “정밀기계들은 전원이 공급되지 않으면 고장 날 수밖에 없는데 두 달 정도가 한계상황”이라고 밝혔다. 7월로 접어들면 기계가 녹슬거나 망가지기 때문에 공단이 재가동되더라도 사실상 공장 가동은 불가능해진다는 것. 장 대표는 “부품을 생산하는 기계업체와 달리 옷·신발 등 완제품 생산업체는 개성에서 모든 생산 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에 피해가 훨씬 크다”고 덧붙였다. 당초 우려대로 협력업체들의 손해배상(클레임) 청구, 거래처 단절도 현실화됐다. 녹색섬유 박용만 대표는 “우리 회사도 20년 넘은 거래업체로부터 피해 내역이 남긴 내용증명서를 받았다”며 “입주기업들이 ‘도산의 무덤’으로 매일 한걸음씩 다가서는 형국”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또 다른 의류업체도 최근 거래처로부터 60억∼70억원에 달하는 피해 배상 견적을 받았다.

 입주기업에 부자재 등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의 피해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삼덕통상에 5년째 상자를 납품하는 한 협력업체 사장은 “유일하게 거래하던 업체의 라인이 중단돼 우리도 일감이 70% 떨어졌다”며 “입주기업들은 경협보험이라도 있지만 협력업체들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어 매우 불안하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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