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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축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대학생들이 웅성거린다. 담배 연기가 뽀얗다. 「마이크」에서 기어이 연사의 등장을 알리자 강당은 별안간 잠짓해진다. 교수가 강단에 오르는 것을 보고 학생들은 우레같은 박수를 보낸다.
창밖에서도 발돋움을 하는 학생들이있다. 몇시간이나 성황을 이룬 강당안은 열기에 달아 후끈하다. 때로는 박수가 쏟아지고 때로는 폭소가 터진다. 연사도, 학생도, 누구하자 피로한빛이 없다. 그들의 열의와 진지한 표정들은 감동마저 준다.
요즘 어느대학에서 열리고있는 「대학제」의 한 풍경이었다. 「한국현실에대한 대학의 사명」, 「서구학문에대한 대학의 자세」, 「대학생이본 그들의 한국」, 「학생운동의 방향과 모색」등 「심포지엄」의 「테마」들은 오늘의 대학이 함축하고 있는 내부의 동통들을 노출시키는것 같아, 사뭇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대학들의 축제는 「심포지엄」만은 아니다. 「초대무도회」가 있는가하면 「쌍쌍파티」도 있다. 여대생을 단체로 초대해서 「파트너」는 제비뽑기로 선택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어느 대학이고 이런 「프로그램」은 으레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위주로된 축제도 이따금 본다. 아마 수년래의 풍조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억지춘향」식이다. 추태백출의 주연장으로 변질되기 쉽고, 「심취」도 없는 시늉만의 여흥으로 끝나는 예도 있다.
과연 그것이 대학생의 낭만이고, 「프라스트레이션」(욕구불만)의 해소인지는 냉철히 반성해볼 문제이다. 대학생에게 그런 자유는 잠시나마 허용되어야 한다는 애교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적인 애교 이상은 되지 못한다.
독일의 「알트·하이델베르크」는 대학의 낭만도, 자유의 구가도 아니다. 바로 유한한 「융커」들의 놀음이며, 그것은 대학 「캠퍼스」안에서 벌어진다는 낭만의 억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네카」강변의 축제는 독일의 미주주의발전에 과연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오늘 성찰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학은 보다 근원적인, 그리고 보다 깊고 심각한 자유를 구가해야할 것이다. 대학제는 단순히 흥청거리는 학생회의 「낭만적인 지출」행사를 극복하는데 「지성의 향연」이 같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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