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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배용의 우리 역사 속의 미소

어느 봄날 소녀와 들꽃의 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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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어느 봄날 한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전시장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다. 바로 ‘소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최고대상인 창덕궁상을 받는 영예를 차지했다. 한국근대 여류 채색화의 선구자 정찬영이 그린 작품으로 조선미전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최고상을 받았다.

 한복 차림에 머리를 한 줄로 땋아 내린 어린 소녀가 다홍치마에 흰색의 다홍 반회장 저고리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화면 가득히 담은 작품이다. 그녀의 오른쪽 뒤에는 대바구니가 있고 그 주위에는 할미꽃을 비롯한 들꽃들이 피어 있다. 그러니까 봄나물을 캐러 나온 소녀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일제가 막바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던 암울했던 시절 향토색 짙은 그림을 통해 조선인의 마음을 노래했고 해방의 날을 기약하는 조선인의 앞날에 대한 소망을 한 올 한 올 엮어나간 것이다.

정찬영 ‘소녀’. [도정애 교수 소장]

 우리는 일제시대 대표적인 여류화가를 들라면 우선 나혜석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동양화에서 주옥 같은 작품을 창작해 이름을 날린 정찬영의 경우는 이제까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찬영만큼 일제시기 여성화단에서 찬란한 수상경력을 가진 화가도 드물 것이다. 당시 필체가 유려한 여기자로 명성을 날렸던 윤성상은 정찬영론에서 “현재 조선이 가진 여성화단의 제1인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정씨를 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중략) 적어도 조선 굴지의 화가다”라고 극찬했다. 6·25 때 납북된 남편 대신 가장역할을 하느라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제 곧 어린이날이 돌아온다. 1923년 방정환 선생에 의해 어린이날이 기념일로 정해졌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바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나라를 찾아 희망의 내일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강렬한 사명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소녀’의 선한 표정과 따뜻한 미소가 우리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시절이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