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20세기 최고 작가 … 피카소인가, 뒤샹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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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화비평가 진중권의 관심사는 폭이 넓다. 미학과 미술이론, 미술사도 넘나든다. 『미학 오디세이』 『미디어 아트: 예술의 최전선』에이어 세 권짜리 『서양미술사』를 완성했다. 앙드레 말로의 ‘벽 없는 미술관’을 위한 사진 도판들. (1950년경) [사진 휴머니스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352쪽, 2만원

20세기 이후의 미술사는 한마디로 최악의 난제다. 이를 다룬 책이 많지만 내용이 산만하고 알아듣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들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언제나 예술작품이라는 주관성이 강한 대상을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모순에 노출돼 있으며, 통찰은 허용하되 추측은 금물이라는 엄격한 윤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에는 미술사적인 변화가 몇 년을 단위로 극렬하고 급격하게 일어났고, 또 그런 사건은 현재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역사적 서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요령부득의 미술사에 대한 진중권식의 답변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다. 5년 만에 3권으로 시리즈가 완간된 이 책들은 사회역사적 배경, 미술사조적 특성, 작가적 특성을 적절히 버무려 연대별로 나열하는 일반적인 미술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19세기까지의 미술을 다룬 ‘고전예술 편’이 각 시대 예술의 형상화 원리를 중심으로 다뤘다면,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다룬 ‘모더니즘 편’은 예술가들의 강령과 선언에 초점을 맞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을 다루는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에서는 주요 비평가들의 평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각 권의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은 저자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 이라는 헤겔적 방법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서술하면서 그 안에서 벌어진 미학적 논쟁을 적절히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미학자’ 진중권의 저력이 발휘된다.

 역사를 검토한다는 것은 결정적 혁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 미술 위주로 쓰여진 미술사를 보충하는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한다. 전후 미국미술을 주도했던 형식주의 비평 노선에서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는 피카소였고, 이 발전 노선의 최정점에는 잭슨 폴록류의 추상예술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보로는 해프닝·퍼포먼스·비디오아트·인스톨레이션(설치) 같은 계열의 작품들의 의미가 충분히 잡히지 않았다. 형식주의적 비평을 넘어서면 우리는 20세기 최고로 영향력 있는 작가의 명단을 바꾸게 된다. 더 이상 피카소가 아니라 뒤샹이다. 기성의 사물을 미술관에 끌어들임으로써 시작된 뒤샹의 도발로, 재료에 대한 어떤 터부도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은 뒤샹의 행위와 더불어 질문은 “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이제 질문은 “언제 예술인가”라는 차원으로 바뀌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대됐다는 말이다.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편’이라는 책의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론가들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별 여부와 그 근거가 모두 다른데, 포스트모더니즘론을 주창하는 논자들은 복제·차용·전복 등의 방법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았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은 이런 방법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쟁의 기저에는 아방가르드 논쟁 즉,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예술적 전략의 타당성 논쟁이 깔려 있다. 책은 연속성을 강조하는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단절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병기함으로써 결론을 열어둔다.

 책은 2차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미술계의 현상을 역사로서 조망하기엔 시간적인 거리가 충분하지 않다. 미디어 아트 등 80년대 이후의 신기술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는 미술에 관해서 저자는 『미디어 아트』라는 별도의 책으로 묶은 바 있다.

 미술사 책이란 원래 끼고 살아야 하는 책이다.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처음 미술사를 읽는 사람들은 국 없이 밥 먹는 것처럼 꾸역꾸역 읽게 되는 게 당연하다.

 좋은 미술사 책은 베이스 캠프 같은 것이다. 개요만 잡고, 마음에 드는 작가의 각론, 혹은 특정 시대로 여행을 가라. 그리고 다시 베이스 캠프로 생각하는 미술사 책으로 돌아오라. 그러면 이번에는 좀 더 쉬울 것이다. 개별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지만, 진중권의 미술사는 상당히 유용한 베이스 캠프가 될 것이다. 미술사 공부와 미학 공부를 오랫동안 진지하게 했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정리의 비법이 들어 있는 책이다.

이진숙 미술평론가

●이진숙   미술평론가 혹은 미술중독자. 독일 문학과 러시아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미술 관련 글을 쓰고 강의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미술의 빅뱅』 『러시아미술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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