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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선지 6년…한 많은 동·서 베를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61년8월13일 일요일 아침 「울브리히트」의 공산 동독은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갑자기 철조망과 「블록」으로 장벽을 쌓았다.
이래 6년, 역사에 유례없는 이 장벽은 수많은 비극과 애환을 간직한 채 아직도 『비정의 장벽』으로 엄존 하고 있다. 동서간의 해빙 「무드」는 아랑곳없는 듯 눈에 보이는 국경선으로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은 애초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넘어 오는 탈출자 들을 막기 위해 설치된 것. 이 장벽이 가설되기 전 동독에선 매년 평균 20만명 이상이 서독으로 탈출 해 왔다. 그중 태반이 「베를린」을 통해―.
하지만 어떠한 장벽도 자유 혼을 말살하지 못한다는 듯 이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금년 초까지 약2만5천명이 자유의 품안으로 탈출해 왔다.
그러나 이 장벽은 수많은 가슴에 좌절감과 비극을 안겨 주었다. 장벽을 넘어 오다 사살된 수만 해도 70명. 장벽을 따라 곳곳에 세워진 이들 무명 투사의 십자가가 오늘도 장벽 저 너머와 이 쪽을 지켜보고 서 있다.
장벽을 세우기 전 동서 「베를린」 간의 번영의 격차는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장벽을 세워 서방의 풍요를 눈 가리운 채 건설에 매진해 온 「울브리히트」 정권은 그 사이 「유럽」 제6위의 산업국으로 성장했다. 아직 서독의 번영에는 못 미치지만―.
이에 자신을 얻은 듯 동독은 63년12월 서독과 「통행협정」을 맺어 「크리스머스」, 신정, 부활절 기간 동안 동·서 「베를린」 시민의 교류를 허용했다. 이어 66년10월 서 「베를린」 시장을 동 「베를린」으로 초청하는 등 단계적으로 동서간 교류의 봇물을 터놓았다.
하지만 아직도 동 「베를린」 근교에는 소련군 1개 사단이 진 치고 있고 서 「베를린」엔 미·영·불군 1만5천명이 주둔하고 있어 「베를린」 장벽의 건재를 실감 나게 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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