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6. 청와대 입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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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1971년 4월 울산에서 선거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14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치고 나는 1970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관(1급)이 되었다. 청와대라는 곳에 들어가 보니 낯선 풍경이 많았다. 우선 청와대 사람들은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것을 즐겼다. "나는 각하와 같은 사단에서 함께 근무했었다" "나는 군사령부에 있을 때 모시고 있었다" 등이었다. 과장해 얘기하면 비서관들은 물론 그 밑의 행정관들조차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했다. 개인적 신임의 끈으로 대통령과 탄탄히 연결되어 있는 양 무언의 과시가 대단했다.

대통령과 개인적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구나, 나는 '프랑스 외인부대에 들어와 있는 뜨내기 군인같은 신세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된 선배(윤주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따라 찾아온 데가 엉뚱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할 수 없다. 이제는 물러 설 수도 없게 되었으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도 점점 굳어졌다.

그때 청와대는 71년 4월 27일 실시될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체제로 개편되고 있었다. 수석비서관 인선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일임되었는데 대변인 겸 공보수석비서관만은 대통령이 직접 뽑았다. 그 결과가 윤주영 대변인을 수석비서관으로 하는 공보비서관실의 재편이었다. 그 가운데에 나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왜 청와대는 선거를 앞두고 비서실을 개편해야 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청와대가 효율을 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의 비서실 구성원들은 가깝게는 최고회의 시절, 멀리는 군대를 내세워 대통령과의 친분관계 등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몰려든 비전문 인력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비능률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유가 있었다면 대통령 선거전이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라는 능수능란한 '선동 정치가'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청와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대책을 강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민정 이양(63년) 때까지만 해도 정치부 기자로서 허정 선생이 이끄는 야당과 민주당 잔류파(박순천. 정일형씨 등이 주도) 등 야당의 지류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정 선생의 대변인 송원영씨와 박순천.정일형씨 등의 대변인인 김대중씨와는 항상 어울려 지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 양태에 대해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처지에 있었다.

청와대에서 바라보니 7대 대통령 선거는 어느 때보다 격렬해질 것같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 과거처럼 언론계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관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한쪽 당사자로서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그것은 김대중씨의 선동적 언변 때문이었다. 그의 언변은 겉으론 화려했지만 내용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비현실적 공론(空論)으로 장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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