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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면담 거부' 속셈] 전문가 4인 견해

중앙일보

입력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林東源)특사가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29일 돌아왔다. 면담을 불발시킨 북한의 의도와 그 파장을 전문가들에게서 들었다.

▶김영수(金英秀)서강대 교수=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 문제만큼은 미국과의 창구로 단일화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전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한국은 핵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다.

또 이종석(李鍾奭)인수위 위원이 포함된 특사 일행과의 면담을 거절함으로써 노무현 정부에도 부담을 주겠다는 전략이 포함돼 있다. 결국 金위원장은 앞으로 새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새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의도도 포함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사가 평양을 방문한 시점도 적절하지 못했다. 金위원장은 내심 새 정부가 오는 3월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에서 어느 정도 핵 문제의 가닥을 잡은 뒤 특사를 보내 주길 바랐을 것이다.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 없이 다만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기존 보따리를 가진 林특사나 새 정부의 확실한 특사가 아닌 李위원을 굳이 이 시점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고 金위원장이 판단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번 특사 방문은 한국 정부의 카드만 보여주고 북한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꼴이 됐으며, 또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한 수 낮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게 됐다.

▶허문영(許文寧)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일단 핵 개발 문제로 불거진 한반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 특사를 보낸 것은 당사자인 남한도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 특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함에 따라 성과를 만들어 냈다고는 볼 수 없게 됐다. 이런 결과는 대북 특사가 발표됐을 때부터 이미 예견됐다. 북한은 핵 문제를 제기한 것이 미국인 만큼 미국하고 풀겠다는 게 대외 협상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한이 이런 북한을 설득할지 상당히 의문스러웠고, 결국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특히 북한이 면담을 성사시키지 않은 것은 북한의 대남 협상 전략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외교적 결례로 드러난 북한의 대남 협상 성격과 전략을 들여다보면 남한을 상대로 위장 협상 및 무행동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남한과 협상은 하되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때로 무시와 지연 전술도 병행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고유환(高有煥)동국대 교수=대통령 특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 불발은 북한 핵 문제 해법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북.미 협상에 주력하면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NPT 복귀 등을 요청한 남한 대통령 특사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특사를 면담할 경우 합의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핵 문제에 대한 남북 간의 합의문을 이행하면 북.미 대화에 무게를 실을 수 없어 협상 전략에 차질이 빚어진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남한 정권 교체기에 새로운 정부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것도 면담을 성사시키지 않은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면담 불발 사태는 남북 모두에 타격을 줄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이 특사 파견에 합의했을 때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수용한 것으로 봐야 하는데, 이를 어긴 것은 명백한 외교적 결례로 국제사회에 비춰질 수밖에 없다. 특히 남한은 핵 문제 해결의 주도성이란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 국면에 빠져들 것이다.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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