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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국수 한 그릇 … 내 시는 생활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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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김종해씨가 시인으로 살아온 지난 50년은 좋은 시를 얻기 위해 각을 세우고 날을 가다듬은 날들이었다. 그래야 시가 영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등단 50년. 영예로운 일이다. 반면 시인으로선 고통의 동의어일 것이다. 창작이란 천형(天刑)을 지고 50년을 버티다 보면 젊어서 모난 자락도 뭉뚱그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인 나이’ 지천명(知天命)을 맞은 김종해(72) 시인의 각(角)은 살아있다.

 열 번째 시집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문학세계사)를 낸 그는 ‘시인의 말’을 이렇게 연다. ‘내게는 너무 많은 각角이 살아 있다. 평생 살아가면서 내 몸속에 서 있는 날을 죽이거나 그 각을 무디게 하려면 그것은 시를 버리는 일뿐이다. 나의 삶이 온전히 시 속에 뿌리박고 있을 때 나는 예리한 야생의 날과 각을 느낀다.’

 시에 뿌리를 튼 시인은 늘 꿈틀대는 예리한 날과 각 때문에 그의 말대로 일생 많이 다쳤다.

 “출판사에서 일을 할 때도 늘 바른말을 하며 정곡을 찌른 탓에 곤란을 많이 겪었죠. 말하지 않고 입 닫고 살았으면 편했을 텐데 입이 가려워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예리한 각은 시인의 숙명이자 소명이고, 평생 져야 할 운명이에요.”

 그는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총회 발기인에 이름 올린 뒤 남산 중앙정보부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그에게 시인 정진규와 이근배가 붙여준 별명은 ‘땡비(땅벌)’. 그의 아호 지봉(池峰)도 원래 땡비를 한자로 쓴 지봉(地蜂)에서 아호에 어울리는 한자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각을 끌어안는 지혜를 시인에게 선물했다. ‘세상 속으로 연착륙하는 눈송이는/저마다 하얀 날개를 갖고 있다/가슴 속의 각을 지우고/시야에서 사라지는 눈송이/새해 첫날 아침 내리는 눈은/지상에 닿기 전에/내가 가진 세상의 각을 지우고 있다’(‘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중)

 각이 지워진 자리에는 삶의 경의와 희망이 싹을 틔웠다. ‘한겨울을 지낸 눈부신 봄꽃들이/사시사철 천사의 이름으로 피어서/그대의 이름을 불러준다/살아가는 일에 상처받더라도/그대여, 다시 일어나라/어둠은 잠시일 뿐, 새날은 눈부시다/세상은 모두 그대의 것이다’(‘어둠은 잠시, 새날은 눈부시다’ 중)

 이제 그에게 모든 일상이 시가 됐다. 술 한 잔, 국수 한 그릇, 아들과 친구 등등. 시와 삶의 경계가 없어 보인다. 문학평론가인 이남호 고려대 교수가 “반백 년의 시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상의 느낌과 생각이 그대로 시가 되게 하였고, 시와 삶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라고 평했다.

 그는 “시는 가슴 속에 맺힌, 영혼 속에 깃든 어떤 말씀의 핵 같은 걸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여름 아파트 방충망에 매달려 우는 매미 소리에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의탁하는 시 ‘곡비哭婢가 왔다’처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나는 시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정보부에 끌려가던 날 아침, 아들에게 밥 한 술 먹이려고, 아들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도 해장국을 끓여 먹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시와 노래에 대해서도 말했다. JTBC ‘히든싱어’를 예로 들었다. 가수와 모창자가 함께 출연해 블라인드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청중이 진짜 가수를 찾아내는 프로그램이다. “‘히든싱어’는 청중이나 시청자에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시도 독자에게 그런 집중력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데 요즘 시에는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특히 독자가 해독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그저 암호에 머무는 시가 많다고 지적했다.

 앞으로도 천생 시인일 것인 그는 ‘시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시인이여. 어쩌겠는가. 그대는 그대가 가진 예각을 지혜롭게 감춰라. 그러나 죽을 때까지 일생의 삶 속에서 예리한 날과 각을 세워 한 편의 좋은 시를 얻어야 한다. 모난 삶의 치유가 시 속에 있다.’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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