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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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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어원을 찾아보면 건축가(architect)라는 단어는 최고(archi)와 건설자(tekton)에서 왔다. 카탈루냐 지방의 '최고 건설자'인 안토니 가우디에게 이런 어원은 무미건조하다. 건축가라는 단어를 가우디에게 쓸 때는 그의 작품들의 특징인 아치, 뛰어난 기술, 완전함으로 정리된다. 그의 완전함은 때로 거칠고 오만한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른 수많은 예술가들처럼 초창기의 가우디에게도 지지자보다는 험담꾼이 많았다. 1950년대 초반 한 비평가는 유명한 가우디 건물의 외관에 대해 "상상력의 고문이고, 돌덩이의 태아이며, 외설의 표본”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오늘날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로 칭송하고, 몇몇 사람들은 교황에게 가우디를 성자로 임명해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매년 2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해 가우디의 건물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오는 6월25일 가우디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바르셀로나시와 카탈루냐 지방정부, 그리고 스페인 정부는 2002년을 '세계 가우디의 해'로 선포,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100가지가 넘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스페인 언론은 벌써 이런 현상을 '가우디열풍'이라고 이름지었다.

1852년 태어나 74세이던 1926년말 바르셀로나에서 전차에 치일때까지 가우디는 수많은 논쟁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평생 독신으로 산 채식주의자인 가우디는 대중을 회피했다. 그는 극소수의 개인적인 글만 남겼고, 그의 작품 대부분은 스페인 내전으로 파괴됐다. 그리고 몇장의 흑백사진만 남았는데 그 사진으로는 그의 짙은 푸른 눈을 확인할 수 없다. 공사장에 있지 않을 때 가우디는 무릎 꿇고 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이번달 소피아 여왕이 '세계 가우디의 해'를 선포할 때, 바르셀로나 시청에 미국의 프랭크 게리와 영국의 노만 포스터, 일본의 아라타 이소자키, 스페인의 오리올 보히아스(Oriol Bohigas) 등 '최고 건설자'들이 자리를 함께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할 것이다.

'세계 가우디의 해' 진행자인 다니엘 지라르-미라클(Daniel Giralt-Miracle)은 "카탈루냐 사람들은 그들이 축하하고 있는 가우디와 불편한 관계였다"고 전한다. 그는 "바르셀로나가 마침내 가우디와 우호협약을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지라르-미라클은 바르셀로나의 명물이며 가우디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카사밀라의 넓은 애틱에 이 건축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가우디 공간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이들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는 직설적인 카탈루냐 사람들이 건물외관이 돌인 카사밀라를 ‘채석장’이라고 부르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지라르-미라클은 올해 행해질 회담·전시·학술활동과 베를린·로마·런던·상하이· 필라델피아 등 전세계 도시와 협의중인 개막행사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기념 엽서속에서 볼 수 있는 가우디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미완성의 성가족성당의 이미지를 뛰어 넘는 것이다. (성가족성당의 완공 예정일은 2030년이다.) 그는 "오늘날 가우디는 알려진 것보다 더 대중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꾸고 싶다. 그는 지상의 인간이었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 19세기말로 돌아가 보자. 카탈루냐의 부르주아는 부유했고, 허례가 넘쳐났던 그곳에서는 재능이 뛰어나고 상징적인 건축가가 필요했다.

가우디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도 상반됐다. 건축 비평가인 니콜라스 펩스너는 그의 독창적인 '현대 디자인의 선구자'의 1936년판에서 가우디를 단박에 무시했다. 1962년에야 가우디는 이 책에 이름을 올렸다. 스페인내전 기간에 바르셀로나에 머물던 조지 오웰은 훨씬 직설적이었다. 그는 성가족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끔직한 건물 중 하나'로 단정지었다.

많은 건축가들은 오웰이 허풍을 떤다고 말했다. 르 코르뷔제는 성가족 성당의 일부인 가우디가 디자인한 독창적인 물결 구조의 지붕을 가진 학교를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노먼 포스터는 가우디의 방법을 혁명적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는 장식으로 쪼개진 세라믹 타일을 이용하고, 아치를 즐기고,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것을 통해 가우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매우 화려한 장식을 가진 가우디의 건물은 너무 과장되게 보이기도 하고 저속하게 보일수도 있다. 지난해 하퍼콜린스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뛰어난 전기 '가우디'를 쓴 영국에서 활동하는 네덜란드 건축가 헨스베르겐은 가우디가 부유한 타일상인 마누엘 비첸스의 의뢰를 받아 바르셀로나에 만든 첫번째 개인 건물에 대해 "장식이 너무 많아 방정맞고 품위가 없다"고 말했다.

비록 가우디는 사랑에 재능이 없고 건강도 나빴지만,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에게는 수많은 지원자가 있었다. 특히 사업가인 에우세비 구엘은 그에게 거의 관섭하지 않는 지원자였다. 건물을 짓는동안 계속 그의 디자인을 바꾸는 가우디의 습관 때문에 후원자들은 엄청난 재력을 갖추고 있어야했다. 가우디는 또 카탈루냐 지방에서 돌과 철을 다루는데 가장 뛰어난 장인의 지원을 받았고, 그의 작업실에는 충성스럽고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동료들로 가득찼다. 헨스베르겐은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조셉 호욜에 대해 '가우디에게 막대한 창조적인 영감을 준 조언자'로 묘사했다.

적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은 미완성이다. 그는 종종 의뢰인이나 의뢰기관과 사이가 틀어졌다. 말년에는 더욱 완고하고 무례해졌다. 그의 기질은 아마도 가축 열병의 일종인 브루셀라증에 감염돼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그에게 대체로 호의적이다. 교회내에서는 교황에게 건의해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바르셀로나 대주교는 그를 건축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할 것을 건의했다. 많은 카탈루냐 사람들은 그를 성인화하는데 까지는 찬성하지 않는다. 지라르-미라클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영광스럽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우디가 남긴 유산에 대해 논란중이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지어지던 당시부터 기괴한 각을 이루는 기둥과 아치 때문에 곧 붕괴될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광객과 건축광들은 다행스럽게도 2002년의 축제기간동안 그의 유물을 원형그대로 지켜볼 수 있다. (세계 가우디의 해 공식사이트 www.gaudi2002.bcn.es을 참고.)

언젠가는 어떤 카탈루냐의 공사판 인부가 마누엘 비첸스를 위해 가우디가 디자인한 집의 회랑은 돌출형 벽돌받침대가 무게를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지주를 제거하면 붕괴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 인부는 그날밤 재앙을 기다리면서 몇시간을 대기했다. 그러나 그 회랑은 여전히 가우디의 설계 그대로 남아있다.

1878년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 교장은 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천재 혹은 광인을 배출했습니다"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올해의 기념행사를 통해 역사는 그의 천재성 쪽으로 좀 더 기울 것 같다.

ROD USHER (TIME) / 이의헌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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